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첩보 수집을 넘어, 감시 대상인 해외 인공지능(AI) 기업이 ‘탈중국’할 수 있도록 코치 역할까지 했다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CIA는 최근 중국과의 유착 의혹으로 미국의 블랙리스트에 오를 뻔한 아랍에미리트(UAE) AI 기업 G42를 미국 기술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한 나라의 정보기관이 첩보, 외교, 산업정책을 결합해 AI 패권경쟁의 새로운 플레이어로 나선 셈이다.
아랍에미리트(UAE) 국가안보보좌관인 셰이크 타눈 빈 자예드 알나하얀(오른쪽)이 UAE에서 셰이크 무함마드 빈 압둘라흐만 알사니 카타르 총리 겸 외무장관과 만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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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해외 AI기업에 블랙리스트 피할 해법 귀띔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9일(현지시간) 전·현직 외교·정보·백악관 관계자 30여 명을 인터뷰해 G42를 미국 진영으로 이끈 CIA 요원의 3년을 추적한 기사를 보도했다.
작전은 2023년 윌리엄 번스 당시 CIA 국장이 베테랑 요원 조니 개넌을 CIA 아부다비 지부장으로 발탁하면서 본격화됐다. 미 대사관 직원으로 위장한 개넌의 임무는 셰이크 타눈 빈 자예드 알나하얀 UAE 국가안보보좌관과 그가 이끄는 G42의 중국 연계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엔비디아의 첨단 AI 반도체를 공급해도 괜찮을지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셰이크 무함마드 빈 자예드 알나하얀 UAE 대통령의 동생인 타눈은 국가안보보좌관과 G42 회장을 겸한다. 자산은 1조4000억 달러(약 2080조원)로 추산된다. G42를 UAE의 AI 전략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보는 이유다.
미국이 의심한 건 G42의 과거였다. 중국에서 태어나 미국 하와이에서 대학을 다닌 펑 샤오 G42 최고경영자(CEO)는 2015년 아부다비 사이버보안업체 다크매터의 AI 사업을 이끌었다. 전직 미 국가안보국(NSA) 해커들을 고용해 UAE의 정적, 인권운동가, 언론인 등을 감시했던 회사다. 다크매터는 미 연방수사국(FBI) 수사를 받으며 사실상 해체됐고 샤오의 조직은 현재 G42로 이어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5년 5월 16일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대통령궁 카스르 알와탄에서 열린 비즈니스 포럼에서 발언하고 있다. 왼쪽 세 번째 인물이 펑 샤오 G42 CEO. 로이터=연합뉴스
미 상무부는 2023년 G42를 수출통제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방안까지 검토했다. 앨런 에스테베즈 당시 상무부 산업안보차관은 타눈에게 최첨단 기술 분야에서는 미국과 중국 기업을 동시에 상대할 수 없다며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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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택일 압박…화웨이 장비 뜯어낸 G42
개넌은 이때부터 G42의 대중국 관계를 캐는 동시에 미국이 문제 삼는 대목을 타눈과 샤오에게 전달했다. 해명과 다른 정황이 포착되면 조용히 알려 시정할 기회도 줬다. 감시자가 감시 결과를 감시 대상에게 알려준 것이다. WSJ는 “이후 G42가 데이터센터와 직원들을 미국 측에 공개하고 1억5000만 달러(약 2230억원) 상당의 화웨이 장비를 철거했다”며 “외부 감사인도 선임했다”고 전했다.
G42가 요구를 받아들인 데는 개넌의 전방위적 접근뿐 아니라 철저한 득실 계산도 영향을 끼쳤다. UAE에는 자본, 전력, 부지가 있지만 최첨단 반도체와 세계적 클라우드망은 없다.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글로벌 AI 기업 구상이 실현되기 어려웠다. 미국 진영에 서는 보상도 컸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2024년 4월 화웨이 장비 철거액의 10배인 15억 달러(약 2조2300억원)를 G42에 투자했다. 백악관 당국자는 “G42가 화웨이와 관계를 끊게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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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사이 UAE ‘스윙스테이트’ 지위
이후 G42 측은 미국 쪽으로 돌아섰다. 2024년 6월 샤오는 당시 개발 중이던 중국 기업 딥시크의 AI 기술을 거론하며, G42를 미국 진영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중국 AI가 미국의 우위를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후 샤오를 중국의 대리인으로 보던 의심은 한풀 꺾였다.
7개월 뒤인 지난해 1월 딥시크의 AI 모델이 공개되며 샤오의 경고는 현실로 나타났다. 같은 달 바이든 행정부는 UAE가 조건부로 엔비디아의 첨단 반도체를 공급받을 수 있는 틀을 마련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후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지난해 5월 아부다비에 UAE·미국 AI 캠퍼스를 짓는 계획이 발표됐다. 이곳에는 오픈AI·오라클·엔비디아 등이 참여하는 ‘스타게이트 UAE’가 들어선다. 전체 캠퍼스가 완공되면 미국 밖 최대 AI 허브가 된다.
또 미 상무부는 지난 10일 UAE를 수출통제 우대그룹으로 격상했다. UAE가 미군의 이란 전쟁을 지원했다면서다. 이에 따라 G42는 내년 4월 6일까지 첨단 AI 반도체를 건별 수출허가 없이 공급받을 수 있게 됐다.
2025년 11월 3일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에서 열린 아부다비국제석유박람회(ADIPEC)에서 관람객들이 건설 중인 UAE·미국 AI 캠퍼스 모형을 살펴보고 있다. 이 캠퍼스에는 스타게이트 UAE가 들어설 예정이다. AFP=연합뉴스
WSJ는 UAE가 미·중 어느 쪽으로도 기울 수 있는 ‘지정학적 스윙스테이트’이기 때문에 미국이 공을 들였다고 분석했다. UAE는 막대한 국부와 에너지를 갖춘 데다 지정학적으로 중동·아프리카·남아시아에 AI 서비스를 공급하기에도 유리하다. UAE를 중국에 내주면 이 지역의 AI 인프라가 중국 기술로 채워질 수 있다는 의미다.
이 과정에 관여했던 전직 당국자들은 이후 미국 기업과 UAE를 잇는 역할로 옮겨갔다. WSJ는 “바이든 행정부에서 중동 정책을 총괄했던 브렛 맥거크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조정관의 경우 현재 스타게이트 UAE 참여사인 시스코의 고문”이라며 “영향력이 상당하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