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쿤스트할레에서 전시 중인 ‘싱코페이션 #5’의 한 장면. 정연두는 강릉단오제, 산불, 2대의 피아노 연주 등 관계없어 보이는 3개의 장면을 교차해 새로운 대화를 만들었다. 제목은 ‘엇박’‘당김음’을 뜻한다. [사진 (재)파마리서치문화재단]
‘신주미(神酒米)’라고 적힌 3㎏ 쌀부대가 산더미같이 쌓였다. 주민들이 저마다 소원을 담아 가져온 이 쌀로 강릉단오제에 쓸 술을 빚는다. 화면에는 쌀을 찌고 비비는 손, 강릉단오굿을 하는 무당이 신에게 비는 손, 강원도 산불 등 여러 이미지가 교차했다. 세 부분으로 나뉜 영상의 한편에서는 두 대의 피아노 연주가 펼쳐졌다.
지난 15일(현지시간) 오후 태국 방콕 쿤스트할레에서 열린 정연두(57)의 ‘싱코페이션 #5’ 상영회다. 한국과 태국 저널리스트, 방콕에서 활동 중인 예술가 등 100명 가까운 이들이 숨죽인 채 지켜봤다. 대형 쇼핑몰과 호텔 앞에도 작은 불단이 놓여 있는 방콕, 믿음이 생활화된 이곳에서 보이지 않는 기원의 모습을 시각화한 정연두의 영상은 어떻게 읽힐까.
방콕 쿤스트할레는 태국의 현대미술 1번지다. 2001년 큰 불이 나면서 방치됐던 인쇄소 건물을 카오야이 아트재단이 매입, 보존해 지난해 미디어 아트 전시장으로 개관했다. 외벽은 낙서와 그을음으로 뒤덮여 있고, 내부엔 골조만 남은 날것 그대로의 거친 공간이다. 재단은 태국 재계서열 1위인 CP그룹의 마리사 치아라바논(강수형) 특별고문이 설립했다. 한국계인 그는 CP그룹 수파낏 치아라바논 회장의 부인이다.
오노 요코, 마크 브래드포드도 전시했던 이곳에서 한국과 태국의 예술가들이 만든 강릉 이야기 다섯 편이 다음 달 9일까지 상영된다. 파마리서치문화재단과 방콕 쿤스트할레의 국제 협력 미디어 아트 전시 ‘경계에서 함께 보기’다. 지난해 봄 열린 제3회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출품작 중 고등어·이양희·정연두·홍이현숙·아라야 라스잠리안숙 등 한국과 태국 예술가 5인의 작품을 상영하는 전시다. 베니스 비엔날레 태국 대표 작가였던 라스잠리안숙은 휴가철 대거 버려지는 강릉의 유기견을 소재로 만든 ‘개들의 궁전’을 출품했다.
아티스트 토크에 참석한 정연두(왼쪽). 권근영 기자
이날 상영회를 마친 뒤 정연두 작가와의 아티스트 토크가 이어졌다. 여기서 정연두는 ‘엇박’ ‘당김음’을 뜻하는 ‘싱코페이션’이라는 제목에 대해 “세상이 돌아가려면 박자를 절대 놓치지 않는 사람들의 부지런한 손과 노동도 필요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끔은 음이 빠지는 순간이 필요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시작은 독일 훔볼트박물관에서 발견된 레코드였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병사로 참전했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됐던 고려인들의 망향가 48곡이다. 정연두는 임지선 작곡가에게 여기서 착안한 곡을 의뢰했고, 이를 두 대의 피아노로 연주하는 공연을 열었다. 피아노 한 대는 현을 제거했다. 소리낼 수 없는 건반을 치자 선율 대신 툭툭툭 소리만 났다. 그리움·염원 같은 보이지 않는 것들, 소리를 내지 못하는 피아노의 연주 등 역설적 장면들을 영상에 담은 정연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항상 보이는 것을 믿죠. 그러나 세상엔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 말하지 못하는 것,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 모든 것이 썩어 없어진다 생각하면 슬프지만, 이것이 기묘하게 술로 발효돼 누군가를 위로하는 삶의 지혜도 있습니다.”
15일 오후 방콕 쿤스트할레에서 전시 개막 퍼포먼스를 벌이는 ‘푸너리’와 종이꽃을 든 참석자들. 권근영 기자
강릉의 영상과 함께 강릉의 소리도 왔다. 이날 상영회에 앞서 개막 퍼포먼스가 열렸다. 방콕 쿤스트할레 1층 홀에 징과 꽹과리, 장구 소리가 퍼졌다. 전통연희집단 ‘푸너리’ 4명의 공연이다.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인 강릉단오제 속 단오굿을 동시대 무대 언어로 풀어내는 이들이 신명과 위로의 공연을 펼쳤다.
2022년부터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을 주관해 온 파마리서치문화재단 박필현 이사장은 “강릉에서 제작된 작품이 태국의 새로운 곳에서 선보일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카오야이 아트재단 설립자 마리사 치아라바논은 “이번 전시는 미래를 위한 협업과 우정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