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리더’를 자처하는 유럽연합(EU)의 정책 기조가 흔들리고 있다. 탄소에 이어 메탄 배출 규제까지 잇따라 속도 조절에 나서면서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EU 집행위원회는 20일(현지시간) “메탄 배출 규정을 위반한 기업에 대한 제재를 3년간(2027∼2029년) 유예해달라”고 회원국에 권고했다. EU는 내년부터 수입 천연가스 업체에도 유럽과 동등한 수준의 메탄 배출 규정을 의무화하고, 이를 어기는 기업에 연간 매출액의 최대 20% 달하는 과징금을 매기는 제재 등을 시행할 예정이었다.
이는 중동 전쟁 이후 천연가스 확보에 비상이 걸린 유럽 대부분 국가와 역내 석유·가스 업계, 미국·카타르를 비롯한 주요 가스 생산국의 반발에 따른 조치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업계의 의견을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도, 규제 자체는 건드리지 않는 ‘절충안(compromise)’을 택했다”고 분석했다.
EU 집행위원회는 17일에도 온실가스 감축 속도를 늦추는 방향으로 탄소배출권거래제(ETS)를 완화한다고 발표했다. 2005년 도입한 ETS는 오염물질 배출량이 많은 철강·석유화학 기업의 탄소 배출에 상한을 두고 배출권 구매를 강제하는 제도다.
당초 EU는 기업을 압박하기 위해 2040년까지 탄소배출량 상한을 매년 4.3%씩 줄여나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번 제도 개편을 통해 2031~2035년 3.7%, 2036~2040년 1.7%로 감축 폭을 단계적으로 낮췄다. 로이터는 “중동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비용 급등과 미·중 사이에서 고전하는 유럽 산업계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라고 짚었다.
EU가 핵심 기후 정책에서 잇달아 후퇴하며 속도 조절에 나선 건 에너지 안보가 기후 대응보다 우선이란 판단 때문이다. 유럽이 의존하는 러시아산 가스 공급이 전쟁으로 끊긴 뒤 미국·카타르산 가스 수입 의존도가 커진 상황이라서다. 특히 제조업이 발달한 독일·이탈리아 등 회원국을 중심으로 반발이 거세다. 저가로 밀어붙이는 중국산 철강제품이나 전기차, 태양광 패널 등의 공세로 EU 전반의 산업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도 부담이다.
‘2035년까지 내연기관차(신차) 90% 퇴출’ 등 남은 기후 대책까지 완화 흐름이 이어질 수 있다. EU 집행위원회 관계자는 “탈(脫) 탄소와 산업 경쟁력은 함께 갈 수 있다”며 탄소 중립 목표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