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지구촌을 뜨겁게 달군 2026 북중미 월드컵의 피날레를 보며 한국 축구를 바라보는 마음은 씁쓸하기 그지없다. 초라한 성적표와 무기력한 플레이도 문제지만 더욱 뼈아픈 지점은 그러한 결과를 잉태한 과정에 있다. 그것은 특정 개인의 ‘휴먼 에러’라기보다는 오랜 기간 곪아 온 대한축구협회(KFA)의 ‘시스템 에러’이다. 나는 축구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이번 축구 참사의 원인을 교육자 입장에서 나름대로 진단하고 개선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휴먼 에러 아닌 시스템 에러로 참패
단기성과주의, 입시교육과 판박이
유소년부터 체덕지의 철학 심고
사람 의존 탈피, 원칙·제도로 가야
KFA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절차적 정당성’의 상실에 있다. 국가대표 전력강화위원회 등 의사결정 기구를 제도적으로 마련해 두고도 정작 중차대한 감독 선임 과정에서는 이를 무력화시켰다. 밀실에서 소수의 독단으로 결정이 이루어지고 규칙이 자의적으로 해석된다면 어떤 훌륭한 시스템도 생명력을 잃고 만다. 제도가 권력에 의해 패싱되는 조직은 신뢰를 잃고 방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이번 월드컵에서 탄탄한 조직력으로 찬사를 받은 일본의 행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본축구협회(JFA)는 1993년 J리그 출범 당시 ‘백년구상’을 선언했다. 당장의 승패에 집착하는 엘리트 체육을 넘어 ‘스포츠를 통해 쾌적하고 풍요로운 지역사회를 만든다’는 철학으로 축구를 지역 밀착형 공공재로 접근했다. 나아가 2005년에는 ‘JFA 선언’을 통해 2050년까지 축구 가족 1000만 명을 확보하고 월드컵에서 우승하겠다는 장기 비전을 발표했다. 허황해 보이던 꿈을 ‘재팬 웨이(Japan’s Way)’라는 전략으로 구체화했다. 기술위원회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유럽에 스카우팅 전초기지를 세워 전술 데이터를 축적했다.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에게 8년이라는 긴 시간과 굳건한 신뢰를 부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단단한 시스템 덕이다.
유럽의 전통적 강호 독일의 다스 리부트(Das Reboot) 계획은 더욱 묵직한 교훈을 준다. 독일이 유로 2000에서 1무 2패로 조별리그 꼴찌 탈락이라는 굴욕을 겪고 ‘녹슨 전차 군단’이라는 조롱까지 받을 때 독일축구협회(DRF)는 사령탑 교체라는 미봉책에 머물지 않았다. 분데스리가 1·2부 36개 전 구단에 ‘유스 아카데미 운영’을 프로 라이선스 발급의 필수조건으로 강제했다. 전국 300여 곳에 훈련센터를 세워 유망주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수익의 일정 비율을 유소년 축구에 재투자하도록 법제화했다. 14년의 인내 끝에 이 시스템에서 자란 황금세대가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일본과 독일의 개혁이 성공한 밑바탕에는 당장의 성적 지상주의를 벗어나 ‘뿌리’에 해당하는 청소년의 건강한 성장에 집중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것은 교육과 인재 육성의 관점에서 깊이 새겨야 할 체덕지(體德智) 삼위일체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 반면 우리 국가대표팀의 단기 성적 지상주의나 아이들에게 승리만을 강요하며 혹사시키는 유소년 축구의 현실은 입시 위주 교육과 정확히 궤를 같이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교육의 우선순위가 뒤바뀐 비정상의 시대를 살아왔다. 한국 교육은 입시와 취업을 위한 지(智)만을 최우선에 뒀다. 공동체적 인성인 덕(德)과 신체적 강건함인 체(體)를 보조적이고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능력까지 넘보는 대전환 시대이다. 우리는 다시금 교육의 기본으로 돌아가 체(體)→덕(德)→지(智)로 이어지는 전인교육의 가치사슬을 복원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KFA 개혁은 단순히 다음 월드컵의 성과만을 위한 단기 처방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축구를 소수 기득권의 전유물로 여기는 폐쇄적 카르텔을 깨야 한다. 회장 한 사람에게 집중된 제왕적 권력을 분산시키고 기술위원회와 전력강화위원회가 철저히 독립적으로 기능하도록 거버넌스를 전면 재구축해야 한다. 이렇게 확보된 투명한 행정력과 예산을 성인 대표팀 위주의 기형적 집행에서 벗어나 지도자 교육 현대화와 유소년 육성에 과감히 투입해야 한다. 무엇보다 사람에 의존하는 축구에서 원칙과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는 축구로 전환해야 한다. 아이들이 성적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맑은 땀을 흘리며 건강한 미래사회의 시민으로 자라도록 축구협회가 든든한 시스템의 파수꾼이 돼야 한다.
기적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옥하게 다져진 토양 위에서나 피어나는 꽃이다. 2002년 월드컵 4강의 영광에 취해 언제까지고 제2의 히딩크만 찾아 나설 수는 없다.
지금 한국 축구에 필요한 것은 화려한 명장이 아니다. AI 시대에 걸맞은 ‘체덕지’의 철학을 유소년 그라운드부터 성인 대표팀까지 굳건히 뿌리내리게 할 합리적 시스템의 복원이다. 뼈를 깎는 체질 개선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4년 뒤에도 같은 자리에서 남의 잔치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기약 없는 탄식만 쏟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