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필리핀의 영유권 분쟁이 확전과 진정의 갈림길에 섰다. 22일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마리아 테레사 라자로 필리핀 외교장관과 2년 만에 만나 지난 20일 세컨드 토마스 암초(필리핀명 아융인, 중국명 런아이자오·仁愛礁)에서 발생한 충돌 사건을 논의했다. 왕 부장은 전날 아세안 외교장관회의 참석차 2박 3일 일정으로 필리핀에 도착했다.
라자로 장관은 왕 부장과 회담에서 양국 관계 전반에 대해 솔직하고 포괄적이며 건설적인 논의를 진행했다고 필리핀 외교부는 전했다.
20일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지역인 세컨드 토마스 암초에서 중국 해경이 고무보트에 탑승한 필리핀 해군과 대치하고 있다. 필리핀 국군 제공, AP=연합뉴스
라자로 장관은 우선 20일 아융인 암초에서 중국 해양경비대 요원들이 필리핀 해군 요원에게 저지른 폭력적 행동에 대한 강력한 항의를 재차 표명했다. 이어 “남중국해에서 필리핀의 일관되고 원칙적인 입장을 전달했다”며 “필리핀 군인과 어부의 안전에 영향을 끼치는 사건을 포함해 해양 권리와 이를 침해하는 행동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다”고 덧붙였다.
또 라자로 장관은 필리핀은 국제법, 특히 1982년 유엔 해양법 협약과 2016년 남중국해 중재 판정에 따라 자제력을 발휘하고 긴장을 고조시키는 행동을 피하며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1975년 중국과 맺은 공동성명에 부합하는 하나의 중국 정책을 준수하고 있음을 밝혔다고 필리핀 외교부는 전했다.
중국은 회담 결과 발표에 앞서 린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일부 국가들이 필리핀의 침범과 도발이라는 기본 사실을 무시한 채, 근거 없이 중국을 공격하고 비난한다”며 “계속해서 불법적이고 무효인 이른바 ‘남중국해 중재 판결’을 들먹인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21일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주니어(오른쪽) 필리핀 대통령이 징취안(가운데) 주필리핀 중국 대사를 초치해 대화하고 있다. 필리핀 대통령궁 제공, AP=연합뉴스
앞서 양국은 서로 대사를 초치하며 강도 높은 외교전을 벌였다. 필리핀 대통령궁은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이 징취안(井泉) 주필리핀 중국대사를 초치했다며 교섭하는 사진을 배포했다. 다만 징 대사는 면담이 강경한 외교 교섭이 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상호 비난보다는 최근 사태가 양국 관계에 끼친 어려움과 도전에 대해 솔직하고 깊은 의견을 교환했다고 밝혔다고 홍콩 명보가 보도했다.
중국은 차관보다 낮은 국장급이 주중국 필리핀대사를 초치했다. 중국 외교부는 이날 변경해양사무국 책임자가 필리핀 대사를 긴급 초치(召見·소환해 만남)해 “필리핀이 불법적으로 ‘좌초’시킨 군함에서 고무보트 2척을 내려 위험한 방식으로 중국 해경 선박에 접근·충돌시켰고, 필리핀 인원이 중국의 법 집행 인원을 악의적으로 방해·공격해 안전을 위협했다”고 주장했다. 초치를 소견(召見)과 약견(約見·약속하고 만남)으로 나눠 강약을 구분하는 중국이 강한 불만을 드러낸 셈이다.
반면 필리핀군은 중국 해경 고속단정이 지난 1999년 세컨드 토마스 암초에 정박시킨 BRP 시에라 마드레함을 촬영하려 접근하자 이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중국 측이 몽둥이로 필리핀 해군을 가격해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반박했다. 양측은 모두 소셜미디어(SNS)에 현장 영상을 공개하며 상대의 선제 도발을 주장했다.
양국의 외교전은 진영 대결로 번졌다. 페니 웡 호주 외교장관은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 외교장관회의에 맞춰 발생한 이번 사건을 “안정을 저해하는 위험한 행위”라며 중국을 규탄했다. 미국 국무부도 성명을 내고 중국의 필리핀 해군에 대한 행동은 “위험하고 공격적”이라며 규탄했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취임 후 첫 필리핀 방문을 앞두고 현지 언론 기고를 통해 동남아에서의 항행의 자유 수호 의지와 필리핀 방어 공약을 재확인했다.
22일 테레사 라자로 필리핀 외교장관(왼쪽)과 왕이(오른쪽) 중국 외교부장이 아세안 외교장관 회담 계기로 회담을 갖기에 앞서 서로 응시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에 왕이 부장은 21일 카오 킴 호른 아세안 사무총장에게 항의했다. 왕 부장은 회담에서 “필리핀 군경의 일부 세력이 고의로 도발해 해상 사건을 일으켰으며 이는 외부 세력의 이익에 봉사하고 중국·필리핀 관계 개선과 남중국해의 평화·안정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왕 부장은 23일 상하이협력기구(SCO) 외교장관회담 참석을 위해 키르기스스탄 촐폰아타로 떠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8월 비슈케크에서 열리는 SCO 정상회담에 참석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