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전후의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영국 총리 처칠은 한국에 관해 아는 것도 별로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한국에 대한 영국의 관심은 영국 외무성 극동국의 풀드(L. H. Fould)가 “한국은 영국 왕실 근위병의 유골 한 토막만 한 가치도 없는 나라”라고 보고한 것이 그들의 진심이었다. 영국이 한국에서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그들이 고민한 것은 실리가 아니라 명분이어서, 4대 강국의 회원국으로 자리를 차지한 것만으로도 과분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영국은 한국의 신탁통치에 참여했지만, 정책 결정 과정에서 그들은 한국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에 외무성은 당시 촉망받던 청년 학자로 조사국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던 토인비(사진)에게 한국의 미래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1945년 1월 31일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그는 ①한국인은 대의 기구를 조직하여 운영한 경험이 없고 ②중경(重慶) 임시 정부는 독립된 국가의 합법적 정부로서 통치 능력이나 민중적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하며 ③한국에서 현재나 일본이 멸망한 뒤 표면화될 지하 단체들은 외국의 도움이 없이도 안정된 체제를 구축할 능력이 없다 ④다만 한국민에게 기회와 경험이 주어진다면 그들이 일정 시간 안에 근대 국가의 관리 능력을 갖출 수 없으리라고 추정할 만한 근거는 없다고 결론을 지어 보고했다.
이 보고서를 받은 처칠은 현재로써 한국은 자치의 능력이 없으며, 따라서 일본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는 있지만 독립시켜줄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 “적절한 절차를 밟은 뒤에”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 제안이 채택되어 한국은 해방과 더불어 독립하지 못한 나라가 되었다. 한 나라의 비극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떳떳하지 못하지만, 현대사를 들여다보노라면, 토인비의 보고서가 원망스러울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