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국해 영유권 갈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왕이 중국 외교부장(오른쪽)이 22일 필리핀에서 열린 아세안 외교장관회의에서 테리사 라자로 필리핀 외교장관을 마주 보고 있다. [AFP=연합뉴스]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물리력을 동원하는 한편 무인도 관리 체계까지 손질하며 해양 패권 강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해경과 해상민병대를 앞세워 상대국 선박의 활동을 직접 저지하는 동시에, 도서 지역에 대한 법적·행정적 관리 기반을 강화하는 ‘투트랙 전략’을 통해 영유권 주장을 공고히 하려는 움직임이다.
필리핀군에 따르면 지난 20일(현지시간) 남중국해 세컨드 토머스 암초(중국명 런아이자오, 필리핀명 아융인) 인근에서 중국 해경이 필리핀 해군 병사를 곤봉으로 가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필리핀군은 중국 해경이 자국 함선에 접근해 사진과 영상을 촬영했고 이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중국 해경 요원 8명이 나무 곤봉 등으로 필리핀 병사들의 머리를 때렸다고 주장했다. 반면 중국은 필리핀 측이 먼저 노와 긴 막대를 이용해 공격했다는 입장이다.
20일 세컨드 토머스 암초 인근에서 곤봉을 든 중국 해경이 필리핀 해군에 접근하는 장면. [AP=연합뉴스]
세컨드 토머스 암초가 위치한 남중국해 스프래틀리 군도(중국명 난사군도, 필리핀명 칼라얀군도)는 중국과 필리핀이 영유권을 다투는 대표적 분쟁 해역이다. 필리핀은 1999년 고의로 좌초시킨 상륙함을 전초기지로 활용해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으며, 중국은 이를 불법 점거로 규정하고 보급 활동을 지속적으로 차단해왔다.
차준홍 기자
이번 사건은 외교 분쟁으로도 번지고 있다. 21일 양국이 서로 대사를 초치해 항의한 데 이어 22일엔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마리아 테레사 라자로 필리핀 외교장관이 아세안 외교장관회의에서 2년만에 만나 이번 사건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라자로 장관은 “필리핀 군인과 어부의 안전에 영향을 끼치는 사건을 포함해 해양 권리와 이를 침해하는 행동을 우려한다”고 밝혔다. 중국 외교부는 “일부 국가들이 필리핀의 침범과 도발이라는 사실을 무시한 채, 근거 없이 중국을 비난하고 있다”며 불만을 표했다.
중국은 그동안 해군 대신 해경과 해상민병대를 전면에 내세워 물대포를 발사하거나 항로를 가로막는 방식으로 남중국해에서 분쟁 상대국의 활동을 제약해왔다. 총격 등 전면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무력 사용은 자제하면서도 상대국에는 상당한 피해와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회색지대 전략’이다.
중국은 이와 함께 영유권 주장의 법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 정비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신화통신이 지난 13일 보도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자연자원 자산 관리 제도 체계 개선에 관한 의견’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최근 무인도와 간척지를 포함한 자연자원 관리 체계 정비에 착수했다.
눈에 띄는 대목은 무인도에 대한 권리 체계를 보다 정교하게 구축하겠다는 내용이다. 단순한 관리 차원을 넘어 소유·이용 권한을 제도화하고 이를 경제 활동과 연계해 실질적인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담겼다는 분석이다. 이는 곧 실효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실제 중국은 남중국해에 행정구역을 신설하고 섬 명칭을 공식화한 뒤 관광·어업·자원 개발 등을 추진하며 영유권 주장의 근거를 축적해왔다. 일부 암초를 매립해 인공섬을 조성하고 활주로와 군사시설을 건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1만1000여 개 섬 가운데 94%는 무인도다. 강준영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일종의 선점 효과를 노리는 것”이라며 “행정·법률 체계를 정비하는 방식으로 영유권 주장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전략”으로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