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오이디푸스 왕'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최수종이 신들의 저주에 맞선 인간의 모습을 열연하고 있다. 사진 수컴퍼니 제공
“매일, 매회 공연 때마다 모든 출연진이 모여서 투지를 다집니다. ‘자, 우리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아끼지 말자.' 다들 이번 공연이 세상 마지막인 것처럼 다 쏟아 붓자고 각오하는 거죠.”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왕은 세종, 태종, 수종’이라는 우스개가 있죠. 온 국민에게 친숙한 '왕 전문 배우' 최수종(64)은 요즘 연극 무대에서 고대 그리스의 왕으로 변신해 열연중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날선 표정과 야성의 쇳소리. 허공을 향해 울부짖으며 운명과 맞서는 비장함이 관객을 압도합니다.
그리스의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가 기원전 5세기에 쓴 ‘오이디푸스 왕’은 그야말로 불멸의 고전극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서 ‘시학’에서 ‘완벽한 플롯을 갖춘 최고의 비극'으로 극찬한 작품이죠.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는 본래 이방인이지만 괴물 스핑크스를 퇴치해 왕으로 추대됐고, 선왕의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해 네 아이를 낳고 꽤 오랜 평화를 누렸습니다. 개인적으로나 왕으로서나 흠잡을 데 없는 삶이었죠. 하지만 어느 날, 테베에 가뭄의 저주가 내리고, 신은 기이한 메시지를 보냅니다. “너희 도시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해 사는 자가 있다. 그 패륜아를 처단하지 않는 한 구원은 없다.”
유명한 신화를 소재로, 소포클레스는 완벽한 삶을 살고 있던 오이디푸스가 단 하루 만에 모든 것을 잃고 추락하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냅니다. 그에게 내려진 천벌은 그가 악한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인생의 진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판(hamartia) 때문임을 보여주죠.
이 연극은 일차적으로 관객에게 “아, 인간이란 얼마나 한 치 앞도 모르는 존재인가. 운명의 힘 앞에 겸손해야겠구나”라는 교훈을 주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작품이 진정 위대한 이유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관객의 내면에서 감정의 정화, 즉 카타르시스를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왕비 이오카스테(서영희)와의 진실을 알고 경악하는 오이디푸스. 사진 수컴퍼니 제공
━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최수종이 이 역할 제안을 받은 것은 지난 3월. 사실 올 연말엔 이미 다른 공연을 준비 중이었지만, 오이디푸스 역을 맡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연기한다는 사람으로서 이 작품을 모르는 사람은 없잖아요? 대본을 받아 드는 순간, ‘이건 내가 아니면 안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리고 6주간의 치열한 연습 끝에 최수종은 테베의 왕이 되었습니다. 지난 7월 4일 첫 공연 후 대략 3주가 지난 시점, 그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고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무대 뒤에서 만난 그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소년미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최수종. "손짓 하나, 시선 하나까지 계산된 연기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사진 수컴퍼니 제공
━
매일 아침,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반복한다
Q : 연극은 꽤 오랜만이다.
A : 2017년 ‘하늘로 가지 못한 선녀씨 이야기’ 이후 9년 만이다. 드라마를 하면서도 항상 무대에 대한 갈증이 있었고, 다른 배우들이 무대에 설 때마다 관객으로 찾아가면서, ‘나는 언제 또 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Q : 드라마 할 때와 많이 다른가.
A : 40년 연기를 했지만, 라이브로 관객의 눈빛과 마주치는 건 여전히 두렵다. 지금도 매일 아침, 모든 대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바퀴 런(run)을 한다. 손동작, 다른 배우의 대사까지 모두 혼자 재현하기 때문에 한 시간 정도 걸린다. 하희라 씨(그는 꼭 아내를 ‘하희라 씨’라고 부른다)도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묻는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무대에 올라갈 준비가 안 된 느낌이다.
Q : ‘오이디푸스 왕’의 어떤 부분에 그렇게 끌렸나.
A : 서재형 연출과 대화를 하다가 의견이 일치한 부분이 있었다. 오이디푸스는 정말로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이었다. 극한상황에서도 이 대본의 오이디푸스는 ‘아니에요, 아니에요, 난 더러운 놈이 아니에요.’라며 상대를 존중하는 말투를 쓴다. 그런 인물이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이 가슴에 꽂혔다.
'오이디푸스 왕'의 엔딩. 모든 것을 희생한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추방을 선고한다. 사진 수컴퍼니 제공
━
'희생하는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Q : 원작과는 달리 이 작품의 결말은 오이디푸스의 행동을 ‘희생’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A : 그렇다.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고, 진실만 외면하면 태연히 잘 살 수 있는 사람이지만 모든 것을 던지고, 과거를 파헤치고, 자신의 잘못을 직시한다. 이거야말로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진정한 왕의 용기가 아닐까. 그렇게 그가 진실을 직면하고 자신을 추방한 순간 테베에는 가뭄을 끝내는 비가 내린다.
Q : 이 결말에 만족하나.
A : 물론이다. 이 결말은 또 이 시대의 어른들에게 던지는 선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기성세대로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지만, 그것을 피하지 않고 우리가 만든 세상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 리더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Q : 가장 마음에 남는 대사가 있다면.
A : 엔딩에 "나는 살았고, 그들을 사랑했고, 그래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또 걷는다"라는 독백이 나온다. 이 말은 어느 시대에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가장들, 아버지들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말처럼 들린다. 이 독백을 마치고 나면 남자 관객들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보이곤 한다.
Q : 자녀들은 연극을 보았나. 어떤 반응을 보였나.
A : 그렇게 깊은 이야기까지는 해보지 않았다(웃음). 그냥 “아빠, 너무 감동적이에요. 그런데 너무 힘들게 하시는 것 같아요. 건강을 해치실까 봐 걱정돼요”라고 하더라.
나이가 무색하게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 내는 무대 위의 최수종. 철저한 자기관리가 뒷받침 된 연기다. 사진 수컴퍼니 제공
━
내일을 위해 오늘 몸을 아끼지 않는다
Q : 안 그래도 무대에서 엄청난 에너지의 분출을 느꼈다. 연습도 치열했다던데.
A : 매번 연습장에 1등으로 도착했고, 오는 순서대로 한 번씩 안아 주고 연습을 시작했다. 연습실도 제일 늦게 떠났다. 서재형 연출이 후배 배우들에게 ‘딴 건 제쳐두고, 너희는 일단 저 태도부터 배우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연습에 너무 열중해 한번은 다음날 목소리가 안 나온 적이 있었다.
Q : 지금도 열연하는 모습을 보니 무리는 아닐까 걱정이 든다.
A : 절대 몸을 사리지 않는다. 오늘 보여줄 수 있는 건 오늘 다 쏟아붓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으니까. 체력은 자신 있다. 이럴 때를 위해 평소 몸 관리를 하는게 배우의 직업윤리다.
Q : 나이를 생각하면 놀라운 젊음이다.
A : 2025년부터 최불암 선배의 뒤를 이어 KBS 1TV ‘한국인의 밥상’을 진행하고 있는데, 연출진이 나를 너무 젊게 보아서인지 장작 패기, 보트 조종하기 등 힘든 일을 너무 많이 시킨다(웃음). 사실 놀 것 다 놀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면 절대 이렇게 되지 않는다. 매일 운동하고, 과식도 피하고, 몇해 전 술도 완전히 끊었다.
오이디푸스 역으로 더블 캐스팅 된 최수종(왼쪽)과 양준모. 공연은 8월23일까지 서울 세종M씨어터에서 계속된다. 사진 수컴퍼니 제공
━
다행이다. 아직 갈 길이 멀어서
Q : 아직 축구도 하나.
A : 여전히 일레븐 축구단(구단주 이덕화)의 단장 겸 스트라이커로 뛰고 있다. 축구가 건강엔 큰 도움이 되지만 직사광선 때문에 피부에는 좋지 않아서 하희라 씨에게 늘 잔소리를 듣고 있다. 그래도 체력이 되는 한 축구를 포기할 수는 없다.
Q : 다음에는 또 어떤 작품에 도전하나.
A : 은근히 주변에서 이제 악역을 한번 해 보라고 유혹하는 사람들이 있다. 관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유 없이 주위를 해치는 사이코패스 같은 역할은 전혀 하고 싶지 않다. 만약 악역에 도전한다면, 그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사연이 충분히 구축된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다.
Q : 오이디푸스에 이은 다음 왕은 어떤 왕일까?
A : 여러 왕 연기를 했지만, 연산군이나 광해군 같은 폭군 역할을 한 기억은 없다. 그런 인물들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라면 해 보고 싶다. 일론 머스크도 AI가 가장 대체하기 어려운 직업이 ‘남들에게 감동을 주는 무대 예술’이라고 했다는데, 손숙, 박정자, 박근형 선배 같은 분들이 여전히 현역인 걸 보면 늘 자극이 된다. 다행이다.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