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7월 27일, 조선의 신설 관청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 문무백관이 모여들었다. 영의정 김홍집(사진)이 회의총재에, 박정양·김윤식·조희연·김가진·안경수·김학우·유길준 등 17명이 의원에 임명되었다. 그들의 임무는 내정 개혁을 단행하여 조선을 근대화하는 것이었다. 갑오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19세기 말은 격동의 시기였다. 갑오년은 뜨겁고 처절했다. 1월 전라도 고부군의 민란이 동학이라는 새로운 이념과 만나 전국적인 항쟁으로 번졌다. 민심을 업은 농민군은 4월 27일 전주성 함락 등 승승장구했고, 흥선대원군과 고종은 농민군 및 외척인 민씨 일족과 맞서고자 일본을 끌어들였다. 그렇게 민씨정권이 타도되며 기회를 잡은 개화파는 7월 27일부터 12월 17일까지 약 210건의 개혁안을 제정해 나갔다.
개화파는 우선 궁내부를 설치하여 정부와 왕실을 분리하고 정부 조직을 개편해 자신들의 권력을 확고히 했다. 문벌제도와 반상차별 등의 신분제 철폐, 연좌제 폐지, 조혼 금지 및 과부재가 허용 등을 단행하여 수백 년 간 지속된 봉건적 관습을 일소했다. 갑오농민전쟁에서 제기된 요구의 상당수가 수용된 것이기도 했다.
개화파를 제외한 조선의 권력자들은 개혁을 마뜩잖게 여겼다. 백성들 역시 개혁을 반기면서도 일본을 등에 업은 하향식 근대화에 거부감을 느꼈다. 1895년 을미개혁의 일부인 단발령이 기폭제였다. 임금의 상투까지 자르는 급진적 행보에 민심은 완전히 등을 돌렸다.
근대화보다 왕권 수호가 먼저였던 고종은 1896년 초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김홍집 내각을 무너뜨렸고, 김홍집은 고종을 만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하다가 경찰에 붙들려 군중의 집단 폭력으로 사망했다. 외세의 힘으로 근대화를 이루고자 한 개화파의 모순과, 자신의 안위만을 챙긴 고종의 행보로 인해, 갑오개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