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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경호의 미래를 묻다] 31년 전 삼성이 기흥 지방도 3.6㎞를 직접 확장한 까닭

중앙일보

2026.07.26 08:14 2026.07.26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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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경호 한국에너지공대 교수

부경호 한국에너지공대 교수

한 달 전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정부와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서남권에 메모리 팹 4기를 짓는 800조원 투자 계획을 밝혔다. 정부 반도체 전략의 핵심은 ‘속도전’이다. 투자에서 양산까지 시간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반도체 산업에서 하루의 지연은 하루로 끝나지 않는다. 전력·용수·부지·인허가 중 하나만 늦어도 장비 반입도 양산도 줄줄이 밀린다. 승부는 투자 발표일이 아니라 첫 제품이 시장에 나오는 날 결정된다. 결국 인프라 병목을 누가 먼저 뚫느냐가 패권을 가른다.

반도체 노광장비 반입 어렵자
직접 인프라 증설, 초격차 토대
800조 규모 서남권 반도체도
인프라 병목 방지, 정부의 할 일

경기도 용인시 처안구 원삼면의 용인반도체클러스터 일반산업단지 공사현장. SK하이닉스의 대규모 반도체 생산시설인 메모리팹 등이 들어선다. [연합뉴스]

경기도 용인시 처안구 원삼면의 용인반도체클러스터 일반산업단지 공사현장. SK하이닉스의 대규모 반도체 생산시설인 메모리팹 등이 들어선다. [연합뉴스]

이 병목은 31년 전 기흥에도 있었다. 1995년 12월 한 일간지 보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경기도와 합의해 기흥IC에서 반도체 공장으로 이어지는 지방도 3.59㎞ 구간을 왕복 2차로에서 4차로로 넓히기로 했다. 설계비·공사비·보상비 305억원은 전액 삼성 몫이었다. 256M D램 개발비 1200억원의 4분의 1을 도로에 투입한 것이다. 공사는 삼성전자가, 보상 행정은 경기도가 맡아 이듬해 착공, 1997년 말 완공을 목표로 했다. 국가 예산으로 넓힐 도로를 민간이 스스로 떠맡은 파격이었다.

삼성이 직접 건설한 왕복 4차로
필자가 당시 삼성 경력사원 입문교육에서 들은 바로는, 차세대 공장에 들여올 노광장비는 왕복 2차로 길로는 반입할 수 없었다고 한다. 삼성에 이 도로는 교통시설이 아니라 생산 공정의 연장이었다. 1995년 삼성의 병목은 기술도 자본도 아닌, 그 왕복 2차로 도로였다. 공장도 장비도 오기 전에 길부터 넓혀, 닥치지도 않은 병목을 미리 걷어냈다. 시대적 배경도 있었다. 그해 6월 첫 전국동시지방선거로 민선 지방자치가 출범한 지 불과 반년이었다. 수도권 개발 억제로 도로 예산은 뒷전이었고, 수원·용인·화성으로 행정구역이 갈려 책임 주체도 모호했다. 다급했던 삼성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 결단의 정점에는 고(故) 이건희 회장이 있었을 것이다. 행정을 기다리다가는 막 올라선 세계 1위 자리를 내줄 수도 있었다. 1995년은 삼성이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도약하던 때였다. 1983년 64K D램 개발 때는 선진국과 기술 격차가 4~5년이었지만,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개발했고, 1993년에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 전체에서 세계 1위로 올랐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는 것과 지키는 것은 다른 문제다. 당시 자본과 소재·장비에서는 일본이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삼성의 답은 속도였다. 64M가 채 자리 잡기도 전에 1994년 256M D램을 가장 먼저 내놓았고, 남들이 주저하던 8인치 웨이퍼 양산 라인을 세계 최초로 기흥에 지었다. 1995년 삼성 반도체 부문은 매출 8조1348억원, 영업이익 2조7192억원의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다. 진짜 실력은 그 돈을 재투자하는 속도였다. 호황의 현금을 차세대 라인과 장비에 쏟아붓고, 기흥 단지 2배 증설 계획을 1996년 말 발표했다. 1995년 도로 확장과 이 증설은 하나의 흐름이었다. 초격차는 기술혁신만이 아니라 투자·개발·양산의 시차를 거듭 줄인 시간들의 누적이었고, 눈앞의 병목은 물론 미래에 닥칠 것까지 미리 걷어내는 집요함이었다. 일본과의 초격차는 그렇게 시작됐다.

31년이 지난 지금, 반도체는 기업 한 곳이 도로를 내서 감당할 규모가 아니다. 서남권에는 발전소와 송전망, 산업용수와 진입도로 같은 기반시설은 물론 정주환경과 협력사 생태계까지 함께 움직여야 한다. 대만은 수년 걸리던 TSMC 가오슝 팹 환경평가를 45일 만에 끝냈고, 일본은 구마모토에서 농지였던 TSMC 공장 부지를 4개월 만에 용도 변경했다. 그 결과 구마모토 팹은 착공 2년 8개월 만에 가동됐다. 중국은 한발 더 나아가, 10년간 6868억 위안(약 150조원) 규모의 국가펀드를 조성해 팹 증설에 직접 자금을 투입한다. 방식은 달라도 방향은 같다. 적어도 첨단 전략산업에서 ‘정부는 비켜서라’는 신자유주의 시대는 끝났다. 우리는 어디쯤인가. 동서울변전소 증설은 하남시 인허가에 막혀 2년째 멈춰 있다. 인프라 병목이 지자체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역할은 명령 아닌 속도
물론 정부가 무엇을 어떻게 만들지까지 지휘하라는 뜻은 아니다. 제품과 공정은 기업이 정하고, 정부는 그 결정이 제때 실행되도록 병목을 없애야 한다. 없앨 병목은 환경·안전 기준이 아니라, 그 기준을 심사하는 시간이다. 전력·용수·도로·인허가가 서로 다른 기관의 책상을 차례로 거치게 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검토하고 미리 조정하며, 한 책임자가 착공부터 가동까지 공정표를 챙겨야 한다. 정부의 역할은 명령이 아니라 속도의 보장이다. 속도전의 성적표는 협약 건수가 아니라, 예정된 날 전력이 들어와 장비가 반입되고 첫 웨이퍼가 나왔는지, 최종 결과로 매겨야 한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1995년 그 도로는 지금도 기흥IC에서 삼성전자 반도체 캠퍼스로 이어지는 ‘삼성2로’로 남아 있다. 지난 31년간 그 길로 장비가 반입됐고, 세계로 수출될 반도체가 실려 나왔다. 그렇게 미리 걷어낸 병목들이 오늘의 반도체 초강국을 만들었다. 그 황금시대를 이어갈 길도 다르지 않다. 당시 기흥의 결단은 기다리지 말고 직접 길을 내라는 것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기업 하나가 뚫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국가가 길을 내야 한다. 반도체 전쟁에서 늦게 도착한 공장은 없는 공장과 같다. 800조원의 청사진을 현실로 바꾸는 힘은 발표문의 숫자가 아니라, 어제의 병목은 물론 미래의 병목까지 오늘 걷어내는 내일모레의 속도다.

부경호 한국에너지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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