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1955년 개발한 세계 최초 원자력 추진 잠수함 ‘USS 노틸러스’ 진수 장면. 연료 보급 없이 장기간 항해할 수 있는 원자력 추진 잠수함은 전쟁 공간을 바닷속으로 확장, ‘물밑 전쟁’의 시대를 열었다. [사진 위키백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잠수함은 더 이상 적의 수송선을 기습하고 군함을 침몰시키는 보조 전력이 아니다. 원자력 추진과 탄도미사일, 핵무기가 결합하면서 한 국가의 생존과 세계의 전략적 균형을 떠받치는 은밀한 지배자로 성장했다. 핵잠수함의 등장은 단순히 새로운 함정 하나가 추가된 사건이 아니라 인류의 전쟁 공간을 바닷속으로 확장한 ‘물밑 전쟁’의 시대를 열었다.
이 군사혁명의 출발점은 독일의 U-보트다. 독일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잠수함이 상대국의 생명선을 차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특히 2차 대전에서 독일은 여러 척의 U-보트로 연합군 수송선단을 집단 공격하는 ‘울프팩 전술’을 구사하여 영국과 미국을 연결하는 해상보급로를 끊어 한때 대서양을 죽음의 바다로 만들었다.
전쟁 후반 독일은 잠수함의 역할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키려 했다. 잠수함에 로켓을 결합해 바다에서 적국의 본토를 공격하려 한 것이다. 1942년 독일은 U-보트 갑판에 로켓 발사대를 설치하고 수면과 수중에서 로켓 발사 시험에 성공했다. 비록 사거리가 짧고 정확도가 낮은 무유도 로켓이었지만, 로켓이 물속에서 점화되어 수면을 뚫고 비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입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1944년 말에는 훨씬 대담한 계획이 추진됐다. U-보트가 V-2 탄도미사일을 수밀식 원통형 발사통에 넣고 미 동부 해안까지 예인한 뒤 이를 발사, 뉴욕과 미국의 주요 도시를 공격한다는 ‘프뤼프슈탄트 XII’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종전까지 완성되지 못했다. 잠수함에서 V-2를 발사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잠수함의 은밀성과 장거리 탄도미사일의 파괴력을 결합하려 했던 독일의 구상은 전후 전략잠수함의 출현을 예고했다.
핵잠, 적국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전략무기 1945년 독일이 패망하자 독일 과학자와 군사기술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미국은 ‘페이퍼클립 작전’을 통해 베르너 폰 브라운을 비롯한 독일 로켓 과학자들을 미국으로 데려갔다. 소련 역시 독일 점령지역에서 V-2의 설계도와 부품, 생산시설을 확보하고 독일 기술자들을 소련으로 이주시켰다.
이후 미국과 소련의 잠수함과 로켓 개발 경쟁이 시작되었다.
잠수함의 진정한 혁신은 미사일보다 먼저 추진기관에서 일어났다. 기존 잠수함은 물속에서 배터리를 사용하고 충전을 위해 정기적으로 수면에 떠 오르거나 스노클을 올려 외부 공기를 빨여들여(배기가스도 배출) 디젤기관을 가동해야 했다. 잠수함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실제로 대부분 시간을 수면에서 항해하고 필요할 때만 잠수하는 함정에 가까웠다.
미국 핵잠수함의 아버지 하이먼 리코버 제독. [사진 위키백과]
미국은 하이먼 리코버 제독의 지휘 아래 원자로를 잠수함 동력으로 사용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그 결과 1955년 1월 17일 세계 최초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 USS 노틸러스가 “원자력으로 항해 중”이라는 역사적인 신호를 보냈다. 원자력은 잠수함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연료 보급 없이 장기간 항해할 수 있고,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고도 수개월 동안 깊은 바다에 숨어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진정한 잠수함’이 탄생한 것이다.
한편 소련은 1955년 9월 디젤잠수함(B-67)에서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세계 최초의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 시험이었다. 다만 이 미사일은 잠수함이 수면 위로 부상한 상태에서 발사한 것으로 사거리도 약 150㎞에 불과했다.
미국은 원자력 추진 잠수함을 먼저 만들었고, 소련은 탄도미사일 탑재 잠수함을 먼저 개발했다. 두 기술을 하나의 완성된 전략체계로 먼저 결합한 국가는 미국이었다.
1978년 전략원잠 ‘USS 로버트 E 리’에서 SLBM 폴라리스 A3가 발사되고 있다. [사진 위키백과]
1960년 미국 핵잠수함 USS 조지 워싱턴이 물속에서 최초로 발사한 폴라리스 탄도미사일(SLBM)은 약 2000㎞ 비행에 성공했다. 이 잠수함은 16발의 핵탄두 미사일을 싣고 장기간 바닷속에서 작전할 수 있었다. 오늘날 전략핵잠수함(SSBN)의 기본 형태가 이때 완성됐다. 원자력 추진 잠수함, 고체연료 탄도미사일, 수중발사, 관성유도, 핵탄두가 하나로 결합하면서 잠수함은 도시와 산업시설은 물론 적국의 국가 기능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전략무기가 되었다.
전략핵잠수함이 두려운 이유는 핵미사일을 탑재하고 이동하는 잠수함의 위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육상 미사일 기지는 인공위성에 노출될 수 있고, 전략폭격기는 비행장에서 공격받을 수 있지만 깊은 바닷속 전략핵잠수함의 위치는 쉽게 알 수 없다. 전략핵잠수함이 핵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무기이지만, 역설적으로 핵전쟁을 막는 무기인 이유다. 상대가 핵 선제공격을 한다면 자신 역시 핵잠수함의 보복 공격으로 치명적인 파괴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함으로써 핵 공격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잠수함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가의 최후를 지키는 보험이자, 전쟁을 막는 침묵의 방패라고 말한다.
냉전기 미국과 소련은 상대 전략핵잠수함을 찾기 위해 수중음향감시체계와 대잠초계기, 공격원잠, 해저 감시망을 총동원했다. 전략핵잠수함이 이동하는 길목을 지키는 잠수함과, 이를 찾아 파괴하려는 공격잠수함이 깊은 바다에서 서로를 추적했다.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물밑에서 인류의 운명이 걸린 추적과 회피가 계속된 것이다.
냉전 이후 잠수함의 역할은 오히려 확대됐다. 핵 전략무기를 탑재하지 않는 일반 잠수함은 적 잠수함과 수상함을 공격할 뿐만 아니라 순항미사일로 내륙의 지휘소와 방공망을 타격한다. 특수전 병력을 은밀히 침투시키고, 해저 통신망과 기뢰를 감시하며, 상대국 연안에서 전자정보와 음향정보도 수집한다.
20세기 초 해군력의 상징은 거대한 전함이었다. 2차 대전에서는 항공모함이 전함을 대신해 바다의 주인공이 됐다. 그러나 지금 가장 두려운 무기는 핵무기를 탑재하고 바다 물속 보이지 않는 곳을 항해하는 잠수함이 되었다. 항공모함은 국가의 힘을 보여주지만, 핵잠수함은 상대가 그 힘을 쉽게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가의 의지를 지킨다.
오늘날 잠수함은 단순히 군사 무기로만 머물지 않는다. 21세기 바다 밑에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국가 생명선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인터넷과 국제 금융거래, 국가 간 데이터 통신의 대부분을 연결하는 해저 통신케이블, 국가와 국가를 연결하는 해저 전력케이블, 그리고 석유와 천연가스를 운반하는 해저 파이프라인이 모두 바다 밑에 놓여 있다. 앞으로 해상풍력이 확대되고 해저 데이터센터와 해양 에너지 시설이 발전할수록 해저 공간의 경제적, 전략적 가치는 더욱 커질 것이다. 현대 국가에서 바다 밑은 더 이상 군사작전만의 공간이 아니다. 통신·에너지·금융·산업·군사가 하나로 연결되는 국가 핵심 인프라의 공간인 것이다.
미국, 1960년 오늘날의 전략핵잠 형태 완성 이러한 시설들은 그러나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저 케이블이나 파이프라인이 절단 또는 손상될 경우 사고인지, 고의적인 파괴공작인지 즉각 판단하기 어렵다. 공격 주체를 특정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해저 공간은 현대의 ‘회색지대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은 새로운 안보 영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제 잠수함의 역할은 적 잠수함을 추적하고 억제하는 전통적인 임무와 함께 자국의 해저 통신망과 에너지 인프라를 보호하고, 적의 해저 활동을 감시하는 임무가 더 해지고 있다. 여기에 무인잠수정, 수중 감시센서, 해저 음향탐지망, 인공지능 기반 수중정보 분석체계가 결합하면 잠수함은 개별 무기체계가 아니라 거대한 수중 감시·정찰·억제 네트워크의 핵심 플랫폼으로 발전하게 된다.
대한민국은 세계적인 정보통신 국가이자 에너지와 무역의 상당 부분을 바다에 의존하는 국가다. 해저 통신케이블과 에너지 공급망의 안전은 단순한 산업 문제가 아니라 국가안보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해군의 역할 역시 전통적인 해양방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국가 해저 핵심 인프라를 보호하는 ‘해저안보’ 체계로 확대될 필요가 있다.
해양을 지배한다는 것은 수상함과 항공기로 바다 위를 장악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다 밑 공간을 관리하고 국가 산업의 해저 인프라를 보호하며, 필요할 경우 상대의 수중 활동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 20세기의 잠수함이 바다 밑을 전쟁터로 만들었다면, 21세기의 잠수함은 바다 밑의 국가 생명선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잠수함을 단순한 공격용 무기가 아니라 국가 해양 안보의 핵심 전략자산으로 다시 봐야 하는 이유다.
김진형 전 해군 제독. 해사 36기로 미국 육군 화학전학교 초급장교과정과 해군전쟁대학 지휘관 과정을 마쳤다. 합참 전략기획부장, 제1함대 사령관, 청와대 국가위기관리 센터장(비서관), 구축함(문무대왕함)과 초계함(제천함) 함장을 지냈다. 전 피지 및 남태평양5개국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