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양자 경쟁의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지난 6월, 미국은 양자컴퓨팅에 관한 두 건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주목할 점은 그 초점이 더 이상 하드웨어 '개발' 자체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행정명령의 핵심은 양자컴퓨팅·센싱·네트워킹의 '배치와 상용화(Deployment and Commercialization)'를 정부 전체 차원에서 가속하고, 임기 내에 '상업적으로 유의미한' 양자컴퓨터를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국가전략 자체를 상용화, 현장 배치, 산업 파트너십 중심으로 개편하라는 지시도 뒤따랐다.
이 전환의 함의는 분명하다. 선도국의 승부처가 ‘누가 더 좋은 큐비트를 만드는가’에서 ‘누가 더 빨리 산업과 과학 현장에 양자를 적용하는가’로 이동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은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냉정하게 보자. 범용 양자컴퓨터를 만들어 전체 기술 스택에서 미국, 중국, 유럽과 정면 승부하겠다는 선언은 매력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현실적인 전략이 되기는 어렵다. 이미 수십 년의 축적과 천문학적 투자가 선행된 영역에서 후발주자가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자원의 낭비에 가깝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기술 경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정면 돌파가 아니라,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전장’을 스스로 설계하는 데 있다.
물론 이것이 우리 손으로 만드는 양자컴퓨터, 이른바 K-양자컴퓨터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자체 하드웨어 역량은 장기적인 기술 주권과 공급망 안정을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할 자산이다. 다만 그것을 '최우선 투자'로 내세우기보다는, 산업 현장의 활용과 병행해 단계적으로 키워가는 전략이 훨씬 현실적이다. 활용이 하드웨어 수요를 만들고, 그 수요가 다시 자체 개발을 견인하는 선순환이야말로 후발주자에게 더 빠르고 견고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 전장이 바로 ABC, 즉 인공지능(AI), 바이오(Bio), 양자(Quantum Computing)의 결합이다. 국가 주력 투자 분야인 AI를 축으로, 미래 먹거리인 바이오와 포스트 AI 시대의 차세대 기술인 양자컴퓨팅을 하나로 묶는 것이다. AI는 데이터를 학습하고 추론해 바이오의 경쟁력을 견인하고, 양자컴퓨팅은 고전 컴퓨터가 지닌 계산 한계를 뛰어넘어 바이오의 정밀도를 끌어올린다. 이 세 역량의 교차점에서 비로소 신약 개발, 바이오헬스, 양자 의료기기, 정밀의료가 하나의 산업적 가치사슬로 연결된다.
구체적으로 보자. 분자구조 계산, 약물-단백질 결합 분석, 화학반응 경로 예측처럼 신약 개발의 병목을 이루는 계산 문제에서 양자컴퓨팅은 전례 없는 효율과 정확도를 제공할 잠재력을 지닌다. 한편 AI는 임상시험 설계, 디지털 트윈, 환자군 분류, 바이오마커 발굴, 이상 반응 탐지, 동물실험 대체 등 신약 개발의 거의 모든 단계에서 즉시 활용 가능한 도구다. 산업 생산성과 직결되는 바이오 신약 개발의 병목 구간 전반에서, 계산과 측정의 문제는 AI와 양자의 적절한 병용을 통해 돌파할 수 있는 문제가 된다.
한국이 이 전장에서 승부를 걸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하다. 우리는 반도체 제조와 패키징에서 세계적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이른바 빅5 병원으로 대표되는 의료 인프라와 임상시험 수행 역량도 이미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의료 AI, 디지털 헬스케어, 바이오의약품 생산, 데이터 기반 임상시험 분야의 기업 생태계도 빠르게 성숙하고 있다. 이 지형을 종합해 보면, 우리만의 경쟁력과 세계를 무대로 한 승부처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의 목표는 모든 양자기술에서 1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양자컴퓨팅, 센싱, 통신을 바이오와 헬스케어 산업 현장에 '가장 빨리' 적용하는 나라가 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더 현실적이고, 더 전략적이다.
여기서 시간이 관건이다. 그렇기에 양자클러스터의 조기 지정이 시급하다. 지정을 내년이나 후년으로 미루면 초기 실증 생태계 조성과 현장 인력 양성에 필요한 1~2년의 골든타임을 고스란히 허비하게 된다. 이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기술 격차로 되돌아온다. 반대로 올해 안에 조기 지정이 이뤄진다면, 국내의 실물 양자컴퓨터 인프라를 기반으로 세 가지 과제를 지체 없이 가동할 수 있다. 첫째, 과학과 산업의 고도화를 위한 양자 알고리즘 개발이다. 둘째, 현장 맞춤형 전문 인력 양성이다. 셋째, 산업체 실증과 기술 지원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양자클러스터가 단순한 연구단지 지정이 아니라 국가 산업 전략으로 설계돼야 한다는 점이다. 미래 먹거리와 포스트 AI 시대를 선제적으로 준비하려면 지역이나 기관이 아니라 기능 단위로 클러스터를 설계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가장 중요한 축이 바로 ABC다. 클러스터 지정은 급변하는 글로벌 양자기술의 지형과 선도국의 목표 설정을 실시간으로 반영하는 전략적 의사결정이어야 한다.
미국이 이미 하드웨어를 넘어 산업과 과학 현장의 전면적 활용으로 방향을 튼 지금,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분명하다. 선두와의 거리가 가장 짧은 양자의 산업적 활용 분야에서, 한국의 미래 먹거리인 바이오 산업 현장에 양자를 가장 빠르게 적용하는 기능적 클러스터를 설계해야 한다. 양자컴퓨터는 더 이상 일부 연구자의 실험실 기술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국가가 방향을 정하고, 산업이 참여하며, 연구와 인재 양성이 함께 움직이는 국가적 지원 체계를 서둘러 구축해야 한다. 골든타임은 지금 이 순간에도 흐르고 있다.
※본 기사의 내용은 정재호 연세대학교 양자사업단장의 견해이며 중앙일보사의 공식 견해가 아님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