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심훈은 내 삶의 시작이자 의무다.” 일제강점기 시인이자 소설가, 그리고 독립운동가였던 심훈(1901~1936)의 셋째 아들 심재호(사진)씨는 2021년 85세로 숨지기 전까지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 생전에 부친의 육필 원고 등을 정성스레 보관한 이유를 “내 고향과 내 민족에게 바치는 마지막 의무”라고 했다.
그가 보관했던 심훈의 자료(46건 59점)가 최근 국립한국문학관에 기탁돼 고국에 돌아온 걸 계기로 미국에 사는 심재호씨 자녀들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4명의 자녀(영주·영민·성보·인보씨)를 대표해 영민씨가 보낸 답신은 광복절인 15일 도착했다. 『상록수』 초판을 든 심재호씨 사진도 함께였다.
재호씨는 아버지가 충남 당진에 지은 집 필경사(‘붓으로 밭을 일군다’는 뜻)에서 자라면서 부친 원고가 일부 소실된 채 굴러다니는 걸 발견했다고 한다. 이후 도서관을 뒤지고 유명 수집가인 백순재씨를 찾아다니며 추가로 자료를 발굴했다. 1970년대 미국으로 건너간 뒤 2007년 자택에 심훈의 자료를 전시하는 작은 박물관도 열었다.
영민씨는 이메일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중환자실에 계셨다. 의식을 되찾고 가장 먼저 물은 것이 할아버지(심훈) 자료 잘 있느냐는 것이었다”고 했다. 또 “우리가 살던 집마다 심훈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날이 오면’은 우리가 처음 배운 한국 시였다”고 밝혔다. 해방의 ‘그날’을 기다리며 쓴 이 시에 대해 재호씨가 생전 “한반도가 통일되는 ‘그날’로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아버지(심훈)가 살아 계셨다면 조국이 둘로 나뉜 현실에 가슴 무너지는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던 사실도 전했다.
영민씨는 “얼마 전에 『상록수』를 다시 읽었는데 1930년대 여성, 소작농민 목소리가 마음에 다가왔다. 심훈의 작품에 담긴 주제들은 우리 가족이 공유하는 진보적이고 인간적인 가치”라며 심훈의 손녀가 미국에서 성소수자 권리를 위해 활동하고, 증손녀가 싱가포르에서 이주노동자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소식도 전했다.
심훈 자료의 한국 기탁은 2019년 처음 논의됐지만 정치적 변화와 코로나19 등으로 지연돼 7년 만에 결실을 맺었다. 기탁 자료는 시 ‘그날이 오면’이 포함된 첫 시집을 비롯해 소설 『상록수』, 『직녀성』 등의 친필 원고로 문학사적·항일독립운동사적 가치가 크다고 문학관 측은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