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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시시각각] ‘처변불경’이라는 낡은 낭만

중앙일보

2026.08.16 08:20 2026.08.16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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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최근 독일 내 연합훈련장에서 벌어진 모의전투에서 미 육군 제1기병사단 소속 기갑여단이 우크라이나 드론 대항군에 ‘전멸’ 판정을 받았다. 대당 100억원이 넘는 에이브럼스 전차와 수십억원짜리 브래들리 장갑차가 고작 수십만~수백만원짜리 소형 FPV(1인칭 시점) 자폭 드론 등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격파 속도가 너무 빨라 ‘격파(KILL)’ 판정을 받은 전차를 살려내 다시 투입해야 훈련이 성립될 지경이었다고 한다.

드론·AI 등 패러다임 바뀌는 전장
변화에 놀라는 예민함 필요한 때
몰려오는 파도 앞 군 흔들기 그만

제1기병사단이 어떤 곳인가. 1921년 창설 이래 2차대전 도쿄 입성, 6·25 평양 탈환의 선봉에 섰던 미 육군의 상징적 부대다. 공식 별칭부터 ‘더 퍼스트 팀’이다. 베트남전에서 세계 최초로 헬기 공중강습을 도입하는 등 군 현대화도 주도했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등장하는 광기 어린 헬기 부대의 실제 모델이 이 사단이다. 그런 막강 전력이 4년여 실전 경험으로 단련된 우크라이나 드론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현대전은 과거의 패러다임을 거부한다. 드론과 AI, 자율무기체계는 전쟁의 문법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있다. 탐지에서 타격까지 초 단위로 이뤄지는 ‘센서-투-슈터(Sensor-to-Shooter)’ 시대라지만, 전장을 뒤흔드는 무기가 꼭 고가 첨단 장비일 필요는 없다.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의 전파방해(재밍)를 뚫기 위해 연줄처럼 광섬유를 풀며 날아가는 유선 드론을 띄운다. 교범에 없는 창의와 변칙이 전선을 뒤덮는 판에 낡은 관념에 묶인 군대는 설 자리가 없다.

최근 안규백 국방부 장관이 공군사관학교 간담회에서 ‘처변불경(處變不驚·변화에 처해도 놀라지 않는다)’을 마오쩌둥(毛澤東)과 자신의 좌우명이라고 소개했다. 국방 수장이 미래의 군 간부들 앞에서 국군과 악연인 인물을 끌어온 것도 놀랍지만, 사실관계부터 의심스럽다는 논란이 벌어졌다. ‘처변불경’이 마오의 좌우명이란 기록은 찾기 힘드나, 그의 숙적 장제스(蔣介石)가 즐겨 썼다는 기록은 선명하다. 1971년 대만의 유엔 축출 당시 장제스가 내건 대국민 핵심 구호가 ‘장경자강 처변불경(莊敬自強 處變不驚, 의연하게 힘을 기르고 위기에도 놀라지 말자)’이었다.

새삼 이념이나 족보 시비를 벌이려는 건 아니다. 핵심은 박제된 시대감각이다. ‘처변불경’에는 적이 몰려와도 눈 하나 깜짝 않는 삼국지식 장수의 낭만이 풍긴다. 현대전은 그런 낭만을 허용하지 않는다. 패러다임이 바뀐 전장에서 필요한 것은 오히려 ‘수시응변(隨時應變)’이다. 상황에 맞춰 방법을 찾아가는 유연성이다. 평정심을 지킨답시고 전장의 변화에 둔감한 것보다는 차라리 화들짝 놀라 새로운 싸움 방식을 고민하는 예민함이 백배 낫다.

따지고 보면 마오쩌둥의 권력 쟁취 과정이야말로 처변불경보다는 수시응변에 가깝다. 국공합작과 내전을 거치며 상황이 바뀔 때마다 전략과 전술을 바꿨다. 적이 강하면 피하고 약하면 치는 유격전으로 판을 흔들었다. 강군의 비결이 유연성에 있다는 것은 다른 군사사(軍事史)도 보여준다. 19세기 프로이센에서 출발해 독일군의 전통으로 이어진 ‘임무형 지휘’가 대표적이다. 상급자가 지휘의 큰 줄기를 잡되 실행의 자율성은 상당 부분 현장에 맡겼다. 원칙은 처변불경일지 몰라도, 행동은 수시응변해야 한다.

우리 군은 이 거대한 파도 앞에 어떻게 서 있는가. 국방부는 첨단 미래전 대비, 합동성 강화, 교육 효율성을 명분으로 3군 사관학교 통합을 밀어붙이고 있다. 하지만 그럴듯한 포장 뒤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육사 출신들이 과거 쿠데타를 주도했으니 힘을 빼야 한다’는 식의 징벌적 정치 논리다. 전 세계가 드론과 AI로 전술의 근본을 엎어치는 시대에 우리는 가능성도 사실상 없는 군사정변의 망령과 싸우느라 군의 교육체계까지 뒤흔들고 있다. 장관이 생도들에게 처변불경을 강조한 속내가 군의 미래를 뒤흔드는 칼질 앞에서도 놀라지 말고 침묵하라는 뜻이 아니길 바란다.





이현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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