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8월 13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에토로후 방문에 관해 취재진에게 발언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쿠릴열도 방문으로 촉발된 러시아와 일본의 영토 갈등이 대사 소환을 둘러싼 외교 신경전으로 번졌다. 러시아의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았던 주러 일본대사는 하루 뒤 소환에 응하기로 했다.
18일 교도통신과 니혼게이자이신문 등에 따르면 무토 아키라(武藤顕) 주러 일본대사는 이날 러시아 외무부를 방문할 예정이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전날 기자회견에서 “일본 대사를 불렀지만 불분명한 이유로 출석하지 않았다”며 “소환에 응하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공개 비판했다.
갈등의 발단은 푸틴 대통령의 지난 13일 이투루프(일본명 에토로후) 섬 방문이다. 푸틴 대통령은 현지 학교와 병원, 수산물 가공시설 등을 둘러보며 이 섬이 러시아의 영토라는 점을 과시했다. 푸틴 대통령이 일본과 영유권 분쟁 중인 쿠릴열도를 직접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 정부는 즉각 반응했다.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총리는 13일 “북방영토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 일본 고유의 영토”라며 “강력히 항의한다.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외무상도 같은 날 니콜라이 노즈드레프 주일 러시아대사를 외무성으로 불러 항의했다.
이에 라브로프 장관도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영토 내 지역을 방문할 수 없다는 일본 측 발언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으며 예의의 선을 넘었다”며 무토 대사 소환을 추진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8월 13일 러시아 사할린주 에토로후섬에서 현지 주민들을 만나고 있다. EPA=연합뉴스
양측이 이처럼 충돌한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토로후는 구나시리·시코탄 섬, 하보마이 군도와 함께 일본이 ‘북방영토’라고 부르는 쿠릴열도 남단 4개 섬 중 하나다. 소련군은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하자 4개 섬을 점령한 뒤 러시아가 현재까지 지배하고 있다.
일본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쿠릴열도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지만, 북방 4개 섬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재임 중 푸틴 대통령과 20여 차례 정상회담을 열며 북방영토 반환과 평화조약 체결에 공을 들였다. 특히 2018년에는 시코탄 섬과 하보마이 군도의 인도를 규정한 1956년 일·소 공동선언을 토대로 협상을 가속하기로 합의했지만, 러시아의 입장 변화로 진전을 보진 못했다.
푸틴 대통령의 전격적인 에토로후 방문은 오는 9월 18∼20일 국가두마(연방 하원) 선거를 앞두고 영토 수호와 애국심을 부각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깔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러시아 국영 여론조사기관 브치옴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의 국정 수행 긍정평가는 지난 1월 75.2%에서 7월 말~8월 초 65.9%로 약 9%포인트 하락했다. 여전히 높은 수준이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지해온 압도적인 지지세에는 균열이 나타난 셈이다.
우크라이나 지원과 대러 제재를 유지하는 일본을 향해 경고를 보냈다는 해석도 있다. 일본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방의 대러 제재에 동참했고, 최근에는 우크라이나와 드론 분야의 협력 논의를 확대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이 북방영토를 직접 방문함으로써 일본의 영토협상 기대를 차단하는 동시에 우크라이나 지원에는 외교적 비용이 따른다는 메시지를 보냈다는 분석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이런 가운데 우크라이나도 푸틴 대통령의 방문 당일인 13일 러일 공방에 가세했다. 안드리 시비하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이날 X(옛 트위터)를 통해 에토로후를 “러시아가 점령한 일본 북방영토의 일부”라며 “불법 점령을 정상화하려는 의도적인 도발”이라고 비판했다.
다만, 이번 사태가 양국 관계의 추가 악화로 이어질 가능성은 적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지난해 11월 이후 중국과 갈등이 격화된 일본 입장에서 러시아와의 전선(戰線)을 추가로 형성하는 데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