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랏빚이 금리를 밀어 올리고, 오른 금리가 다시 빚을 불린다. 세계 국채시장이 빠진 악순환이다. 미국을 비롯한 한국·일본·유럽 등 주요국 장기 국채금리가 일제히 수십 년 만의 최고 수준으로 치솟으며 ‘금리 발작’ 우려를 낳고 있다. 중동발 물가 상승 우려가 급등의 방아쇠를 당겼지만, 기저에는 코로나19를 거치며 불어난 나랏빚과 대규모 국채 발행이라는 구조적 배경이 있다.
19일 로이터 등에 따르면 미국 30년 만기 국채금리는 지난 18일 장중 연 5.327%까지 올라 2007년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이날 일본 10년물도 2.945%로 1996년 이후 최고치를 나타냈다. 독일 10년물은 2011년 이후, 프랑스 10년물은 2009년 이후 최고 수준까지 뛰었다. 한국 30년물도 4.751%로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19일 미 국채 매도세는 일단 진정됐지만 장기 금리는 여전히 역사적 고점권에 머물고 있다.
세계 금리의 기준점 역할을 하는 미국 장기 금리는 경기지표 악화로 연방준비제도(Fed)의 추가 금리 인상 기대가 후퇴하는 상황에서도 올랐다. 재정 적자와 대규모 국채 공급 부담이 겹치며 장기물에 별도의 위험 프리미엄이 붙고 있다는 의미다. 미국 연방정부 부채는 40조 달러에 육박했고, 외부 투자자와 외국정부가 보유한 ‘공공보유’ 국채 규모도 32조 달러를 넘어섰다. 나이절 그린 드비어그룹 최고경영자는 “투자자들은 더 이상 정부 지출이 통제될 것이라고 당연하게 믿지 않는다”며 “통제되지 않을 위험을 가격에 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미일 국채 금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세계 부채 보고서’에 따르면 회원국 정부의 국채 잔액은 지난해 사상 최대인 61조 달러로 불어났다. 올해 새로 발행할 국채도 역대 최대인 18조 달러로, 2022년보다 50% 늘어날 전망이다. 지난해 만기가 돌아온 빚을 새 국채로 갈아타기 위한(차환) 수요만 13조5000억 달러로 전체 차입의 약 80%를 차지했다. 이미 쌓인 빚은 사상 최대인데, 과거 빚을 갚기 위한 국채와 새로운 재정 적자를 메울 용도의 국채가 동시에 시장에 쏟아지는 셈이다.
과거 ‘싼 빚’의 만기가 고금리 시대에 돌아오면서 악순환 고리가 강해지고 있다. 저금리 시대 위기를 막는 소방수 역할을 했던 나랏빚이 고금리 시대에 들어서며 금융 불안의 불씨로 자리 잡고 있다는 얘기다. 연 0~1%대로 빌린 빚을 3~5%대 국채로 갈아타면 원금이 그대로라도 이자비용은 늘어난다. 이런 재정 불안을 우려해 국채를 팔거나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며 정부에 재정규율을 압박하는 투자자를 시장에서는 ‘채권 자경단(bond vigilantes)’이라고 부른다. 1980년대 미국 레이건 정부가 대규모 정부 지출에 나서며 재정 적자를 늘렸을 때 처음 등장했는데, 최근 미국·프랑스·영국 등에서 이 세력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AI 인프라 투자를 위한 회사채 발행 급증도 시장에 부담이다. 정부와 기업이 같은 장기 투자 자금을 놓고 경쟁하는 셈이다. 일본에서는 국채금리 상승과 엔화 약세로 보험사·연기금이 해외 채권 투자를 줄이고 자금을 본국으로 돌리는 ‘리패트리에이션’ 우려도 커졌다. 실제 일본의 미 국채 보유액은 최근 2개월 연속 감소했다.
국가채무 비율
박상현 iM증권 연구위원은 “일본 국채금리가 더 오르면 2022년 영국 트러스 총리발 금리 발작과 같은 ‘제2의 트러스 쇼크’를 유발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당시 영국에선 국채금리 급등이 연기금 마진콜(추가 증거금 요구)과 국채 강제매도로 번졌고 결국 긴축 중이던 영란은행이 장기국채를 긴급 매입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4월 글로벌 금융안정보고서에서 “높은 국가부채와 차환 위험, 비은행금융기관의 레버리지가 국채시장 충격을 확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도 충격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난해 국가채무가 1304조5000억원으로 1년 새 129조4000억원 늘어난 상황이어서, 장기 금리 상승이 이어지면 국고채 차환 비용과 정부 이자 부담도 커질 수 있다. 특히 올해 들어 한국 30년물 금리 상승 폭은 약 1.46%포인트로 미국(0.43%포인트)과 일본(0.67%포인트)을 크게 웃돈다.
시장에서는 이런 고금리 국면이 단기간에 끝나기 어렵다는 전망도 나온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채 투자자를 안심시키려면 선진국 정부가 재정 적자를 줄이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보여줘야 한다”며 “아직 그런 움직임이 뚜렷하지 않아 국채금리 상승 압력이 계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