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고의 발명품 ‘기업’. 기업은 시장과 정부의 한계에 도전하고 기술을 혁신하며 진화해왔습니다. 일자리와 부(富)의 원천인 이 ‘기업’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요? 더 컴퍼니 시리즈는 국내외 최고의 기업을 움직이는 안팎의 힘을 탐구합니다.
독일 화학기업 머크 창업자의 13대 후손인 크리스티나 크래프트는 약사이자, 4개의 지점을 가진 독일 앤젤 약국의 소유자다. 심서현 기자
흰 가운을 입은 약사가 조곤조곤 말했다. “루테인과 비타민A가 눈 건강을 돕는 영양제입니다. 하루 한 번 충분한 물과 함께 드세요.”
평범한 약국의 풍경이다. 약사가 70조원 규모의 자산을 보유한 가문의 계승자라는 사실 외에는 말이다. 지난달 13일(현지시간) 독일 다름슈타트의 앤젤 약국에서 독일 화학기업 머크(Merck KGaA) 창업자의 13대 후손인 크리스티나 크래프트(34)를 만났다. 1668년 그의 조상 야콥 머크가 개업한 바로 그 약국이다.
제약·반도체(소재) 사업을 하는 머크의 시가총액은 약 600억 유로(약 97조원). 머크 가문은 회사 지분의 70.27%, 즉 약 68조원 어치를 보유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보유한 삼성 계열사(삼성전자, 삼성물산, 삼성생명 등) 지분 가치가 약 47조5000억원(8월 18일 종가 기준)임을 감안하면 가문의 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그 후손이 독일 중소 도시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을까. 여기에는 첨단 산업을 이끌면서도 장수하는, 독일 기업의 독특한 지배구조가 반영돼 있다.
김경진 기자
◆첨단 반도체도 300년=머크 가문은 358년간 기업에 대한 지배력을 지켜왔고, 경영권 다툼도 없었다. 도리어 약국에서 제약·화학 회사, 디스플레이용 소재 개발사, 반도체 특수가스 공급사로 변신과 확장을 거듭해 왔다.
머크뿐만이 아니다. 독일을 대표하는 반도체 장비·부품 기업인 자이스(ZEISS)와 트럼프(TRUMPF) 역시 각각 180년과 103년 역사를 자랑한다. 창업 이래 자이스는 ‘현미경→광학거울→반도체 장비’로, 트럼프는 ‘공작소→절단기→반도체 레이저’로 사업을 첨단화하는 데 성공했다. 자이스의 초정밀 거울, 트럼프의 레이저는 전 세계에서 ASML만 만들 수 있는 초미세 반도체용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의 필수 부품이다. 독일 제조업이 중국의 공세에 위기라지만, 이들 3사의 지위는 대체불가다.
세계 톱2 메모리 반도체 기업을 보유한 삼성과 SK는 지배구조의 숙제를 안고 있다. 그룹 창립 88주년인 삼성은 창업 3세대 이재용(58세) 삼성전자 회장이, 73년 된 SK는 2세대인 최태원(66세) 회장이 왕성하게 경영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4세 경영은 없다”라고 지난 2020년 선언한 뒤 향후 지배구조 그림을 공개한 바 없다. SK는 최 회장의 9440억원 규모 이혼 재산 분할 재판이 진행 중이며, 후계 구도는 불확실하다.
한국에서도 독일처럼, 글로벌 첨단 산업을 이끄는 100년, 300년 기업이 나올 수 있을까. 지난달 14~16일 독일 머크, 자이스, 트럼프 본사에서 각사 최고경영진을 만나 장수 기업의 비결을 들어봤다.
머크(Merck). [사진 머크]
◆머크 패밀리, ‘존속’ 최우선=벤자민 하인 머크 일렉트로닉스 최고경영자(CEO)는 “2주 전에도 패밀리(머크 가문)와 반도체 산업 전망에 대해 토론했다”며 “가문 스스로 ‘패밀리 유니버시티’를 통해 과학·산업·경영을 후대에 교육하는 데 힘쓴다”라고 전했다.
머크 가문은 지주사(E.Merck KG)를 100% 소유하며, 지주사는 상장사 머크의 지분 70.27%를 보유한다. 1995년 기업공개(IPO) 때 주식의 30%만 상장했다. 지주사 지분은 300명 이상의 가문 사람들이 나눠 보유하며, 독일 상속세법의 가업 승계 공제 적용을 받아 지분 손상 없이 이를 각자의 후대에 물려주고 있다.
머크는 가업 승계 공제 요건(일정 정도 고용 유지 및 배당률 제한)에 더해, 자체 규약을 두고 있다. 가문 밖의 사람에게 주식을 팔아서는 안 되며, 가문의 일원은 주식 배당금도 일반 주주처럼 받아가지 않는다. 배당금의 상당액을 지주사에 모아뒀다가, 상속세 납부나 인수합병(M&A)에 쓴다. 이들이 지분 70%를 유지하는 배경이다.
머크 가문은 지주사 이사회를 통해 상장사 머크의 최고경영진을 선임·해임하고 경영을 감독한다. 이사 9명 중 5명이 가족 이사다. 단, 가족 이사도 머크에서 근무하지 않는다. 약사 크리스티나는 “큰언니가 머크 가족 이사이지만 다른 회사(BASF)에 다닌다. 우리 일가는 아무도 머크에서 일하지 않는다”라고 중앙일보에 말했다.
예컨대 1904년 세계 최초로 액정 사업을 시작한 머크는 디스플레이 사업에 주력했다가, 2010년대 초중반 전자 소재 사업의 중심을 반도체로 확 옮기는 결정을 내렸다. 지금은 그룹 전체 매출의 약 20%가 반도체 사업에서 나온다. 베네딕트 에른스트 머크 전략담당 수석부사장은 “패밀리의 주 관심사는 회사의 장기 존속이기에, 경영진이 사업 전환 아이디어를 내도록 독려하고 구체화할 권한을 준다”라고 말했다.
자이스(ZEISS). [사진 자이스]
◆“K반도체 성과급, 존속 가능?”=1846년 설립된 독일 광학기업 자이스는 재단이 지분 100%를 소유·지배한다. 창업자 사후 동업자가 창업자 일가 및 자신의 지분을 모아 칼자이스재단을 설립했다. 자이스는 안경점에서 파는 렌즈와 안과의 ‘스마일 라식’ 장비에서부터 우주용 카메라와 EUV 부품까지, 소비재와 첨단 제조업 장비를 넘나든다. 1994년 출범한 반도체 사업부는 자이스의 내부에선 막내 격이지만, 현재 회사 매출의 42%를 차지하는 주력 사업이다. 총 8개 사업부를 운영하는 삼성전자와 닮은 구석이 있다.
프랑크 로문트 자이스 반도체 CEO는 “재단이 경영하기 때문에, 자이스가 장기적 관점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경영할 수 있다”면서도 “주식 시장에서 자금을 쉽게 조달할 수 없다는 점은 고민”이라고 말했다. 그는 삼성전자 성과급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엄청난 보너스가 지속 가능하다고 보는가”라고 기자에게 물은 그는 “특정 사업부에만 막대한 보너스를 지급하는 일은 자이스에서는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각 사업부 CEO라도 자이스 전체의 성공을 최우선으로 하고 공동 책임을 진다”라는 것이다. 그는 “소유주인 칼자이스재단이 사업부 CEO들에게 기대하는 바”라고 덧붙였다.
트럼프(TRUMPF). [사진 트럼프]
◆기계→반도체 변신한 트럼프=1923년 기계공작소로 출발한 트럼프는 현재 라이빙어 가문이 회사 지분 90%를 보유하며 소유와 경영을 동시에 한다. 직계 자손이 없던 창업자는 회사를 회사의 핵심 엔지니어(베르톨트 라이빙어)에게 물려줬다. 발명가 출신 베르톨트는 특허 수익으로 지분을 90%까지 사들였다. 현재는 그의 딸이 회장이다. 베르톨트 슈미트 트럼프 최고기술책임자(CTO)는 “가족 구성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자동으로 경영을 맡는 건 아니다”면서도 “가족 경영자는 기업의 장기적인 방향과 소유주로서 책임을 진다”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사업을 확장해 온 트럼프만의 비결은 호기심”이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레이저를 판금 가공에 활용한 레이저 가공기를 1979년 세계 최초로 개발해 상용화했고, 이후 레이저에서 확보한 광학·제어·전력 기술을 반도체 사업으로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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