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방산업체가 만든 무기체계가 처음으로 미국 시장을 뚫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자회사 한화디펜스USA는 미 육군과 ‘K9 차륜형 자주포(K9MH)’ 시제품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고 19일 밝혔다. 차륜형 자주포는 바퀴 달린 차량에 탑재한 자주포로, 궤도형 자주포(차바퀴 둘레에 벨트를 걸어 놓은 무한궤도 차량에 올린 자주포)보다 기동성과 경제성이 뛰어나다.
한화는 미 육군의 자주포 현대화 사업을 위해 K9MH 시제품 6문을 공급한다. 계약에는 시제품 6문을 우선 발주한 뒤 4년간 12대를 추가 발주할 수 있는 옵션이 포함돼 있다. 6문 납품에 대한 계약 금액은 1억30만 달러(약 1417억원)이며, 추가 발주를 포함한 누적 계약 금액은 2억6290만 달러(약 3715억원)에 달한다.
김경진 기자
특히 이번 시제품 공급 계약은 향후 양산 계약의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미군은 현재 운용 중인 M777 견인포를 대체하기 위해 전장에서 신속하게 이동·타격할 수 있는 차륜형 자주포 확보를 목표로 하고 있다. 방산업계에서는 향후 양산 규모가 500문 이상, 10조원 이상에 이를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미 육군은 앞으로 4년간 작전운용개념에 맞춰 K9MH의 세부 조건을 보완하는 과정을 거치고, 특별한 결함이 없다면 양산 계약을 체결할 전망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관계자는 “이번 계약은 K9 자주포가 세계 최대 방산 시장에 진입한 의미 있는 성과이자 대한민국의 무기체계가 미국을 지키는, 한미동맹의 새 역사를 썼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K9은 1989년 개발을 시작해 1999년 우리 군에 처음 배치됐다. 이후 2001년 튀르키예를 시작으로 폴란드·인도·핀란드·노르웨이 등 9개국에 수출됐고 세계 자주포 점유율 1위로 자리 잡았다. 특히 K9은 수출 때마다 사막, 고지대, 혹한 등 현지 지형과 기후, 작전에 따라 맞춤형으로 제작한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번 계약은 한화가 2017년 미국 내 방산 전시회에 K9 실물을 전시하며 진출을 시도한 지 9년 만에 이룬 성과다.
미군이 진행한 차륜형 자주포 경쟁 입찰에는 독일 라인메탈, 영국 BAE시스템즈 등 세계적인 방산기업이 참전했지만 한화가 이들을 제쳤다. 차륜형은 지금까지 궤도형만 수출해 온 K9엔 새로운 도전이었다. 하지만 미군의 선호와 수요를 일찌감치 포착한 한화는 미국 법인에 미국 정관계 및 군 출신 인사들을 영입하며 대응했다. 결국 올해 초 미국이 원하는 수준의 제품 개발을 완료할 수 있었고, 차륜형 자주포의 첫 해외 진출이란 결과를 얻었다. 시장에서 검증된 성능과 빠른 납기라는 K방산 강점이 다시 한번 빛을 봤다는 평가다.
미국 방산 진출은 한화 김승연 회장부터 김동관 수석부회장까지 2대에 걸친 숙원이기도 했다. ‘미국통’으로 알려진 김 회장은 빌 클린턴, 조지 부시 등 미국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정계 인사들과 오랜 인연을 맺어왔다. 방산 사업에 대해 “방산은 국가 기간산업으로 내수가 아닌 수출 산업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수석부회장은 특히 미국 시장 공략에 주력했다. 미국의 자주포 수요를 예측해 준비했고, 2024년엔 필리조선소를 인수해 현지 해양 방산 거점을 마련했다. 방산업계에선 이번 K9의 공급 계약을 계기로 한화가 미국에 해양·지상 방산 양방향으로 진출할 교두보를 마련했다고 본다.
장원준 전북대 첨단방산학과 교수는 “캐나다 잠수함 수주에 실패한 K방산으로서는 분위기 반전의 계기가 될만한 일”이라며 “향후 국내 방산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비롯한 해외로 진출하는 데 긍정적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