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개관하는 서울 연희동 박서보미술관. 생전의 작업실 옆에 연세대 최문규 교수 설계로 건립됐다. [사진 박서보미술관]
“60여년 전 박서보는 허탈감에 빠져 있는 동료들을 고무하고 스스로 구심점이 되어 앞으로 나아가자고 외쳤습니다. 박서보가 없었다면 단색화는 탄생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국가도 시도 아니고 유가족의 손으로 미술관이 이뤄졌다는 게 박선생답습니다. 박서보 미술관 만세!”
20일 오후 서울 연희동 박서보미술관 개관식, 전날 일본에서 입국한 구순 노화가 이우환의 우렁찬 축사에 환호가 터졌다. 이우환은 1968년 도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연 한국 현대회화전에서 다섯 살 위 박서보를 처음 만났고, 한국 미술계와 접점을 갖게됐다.
박서보. [사진 박서보미술관]
미술관은 박서보(1931~2023·사진)가 생활하며 그림 그렸던 작업실 바로 옆에 지하 2층~지상 3층, 건축면적 2000㎡(605평) 규모로 들어섰다. 대구 간송미술관을 작업한 최문규 연세대 교수 설계다. “꽃이 떨어지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연이 내 스승”이라던 고인의 뜻을 기려 층마다 작은 정원을 두고, 큰 창도 냈다. 빛을 균질하게 통제해야 하는 미술관으로서는 이례적이다. 3층에 올린 층고 8m의 정사각형 건물엔 유작 3점을 설치했다. “내 미술관을 만들면 보여주고 싶다”고 계획했던 높이 330㎝ ‘백색 묘법’ 대작들이 햇빛에 은은하게 빛난다. 2023년 2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그는 그해 10월 상태가 악화됐다. 입원 중에도 “배접하라, 나가면 작업할 게 너무 많다” 의욕을 보이던 게 마지막 말이 됐다.
미술관 3층에 걸린 만년의 백색 묘법 시리즈 세 점(각 330x192㎝). [사진 박서보미술관]
21일부터 여는 개관전은 베트남 출신의 프랑스 여성화가 흐엉 도딘(81)과의 2인전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이다. 박서보의 25점과 흐엉 도딘의 17점을 함께 걸었다. 물에 불린 한지 위에 선을 긋고 밀어내기를 반복한 박서보의 묘법 연작과 광물 안료를 수십 번 겹쳐 쌓아 올린 흐엉 도딘의 회화가 어우러졌다.
박서보는 6·25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후 앵포르멜 계열의 원형질 연작을 선보이다가 1967년부터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자아를 비우는 묘법 연작을 전개했다. 아궁이의 그을음을 닮은 초기 검은 묘법부터, 단풍색을 끌어들인 2000년의 붉은 묘법, 만년의 백색 묘법까지 3000점 넘는 박서보재단 소장품 중 엄선했다.
2023년 여름 개인전을 위해 한국에 온 도딘은 박서보를 찾아왔다. 한국어·영어·프랑스어 통역을 거치며 두 시간 남짓 지난한 대화를 이어가던 중 박서보는 “자연이 내 스승이다. 항상 자연을 관찰한다”고 말했다. 이 때 도딘은 “다 이해했다”며 이 말을 통역하려는 이들을 만류했다. 그해 10월 박서보의 별세 소식을 들은 도딘은 흰 바탕 위에 안료를 겹겹이 쌓아 올린 추상 회화 ‘X.K.N.31’을 완성하고 ‘오마주 투 박서보’라는 부제를 붙였다. 박서보의 차남 박승호 박서보재단 이사장은 “도딘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만난 해외 미술가였다”며 “미술관은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한국의 젊은 미술가, 여성 미술가를 알릴 것”이라고 말했다.
박서보재단이 운영하는 미술관의 관람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월요일 휴관. 개관전은 내년 1월 3일까지다. 관람료는 성인 5000원.
한편 3주기를 앞두고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도 24일부터 10월 18일까지 박서보의 대규모 회고전 ‘변하는 변하지 않는’을 연다. 백자 흙을 사용해 표면에 능선을 새기듯 제작한 ‘묘법 No.220611’(2022)이 공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