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에는 오래된 상식이 하나 있다. 기술은 감가상각이 빨리 된다는 것이다. 노트북도, 서버도, 반도체도 3~5년이면 장부가치가 ‘0원’으로 수렴한다. 그런데 지금 아폴로글로벌·KKR·브룩필드·블랙록·골드만삭스 같은 사모펀드 업계의 거인이 이 상식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곳에 돈을 걸고 있다. 엔비디아가 공개한 5000억 달러(약 705조3000억원) 규모의 신규 금융 플랫폼이 그것이다. 시장에서는 이 플랫폼을 두고 ‘엔비디아의 순환금융’이라고 부른다.
엔비디아의 순환금융이 하는 일은 간단하다. 기술 기업이 엔비디아의 인공지능(AI) 제품(이하 칩)을 직접 구매하는 대신 리스로 빌려 쓸 수 있게 하고, 그 리스에 필요한 자금을 사모펀드가 대주는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 거래의 전제를 이렇게 요약했다. “엔비디아 AI 칩이 금융의 기본 법칙 즉, 빠르게 움직이는 기술은 금세 가치를 잃는다는 법칙을 거스를 수 있다는 데 베팅했다.”
단순 실적만으로 금융 건전성 판단 못해
젠슨 황
실제 엔비디아 칩은 감가상각을 비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X(옛 트위터)에 “최신 칩의 임대료는 계속 오히려 오르고 있고, 6년 된 A100(AI 가속기)조차 애초 예상보다 훨씬 오래 현역으로 쓰이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건 엔비디아가 자사의 소프트웨어 쿠다(그래픽처리장치를 AI 학습·추론이 가능한 프로세서로 전환하는 프로그램)를 통해 사실상 GPU 운영체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 개발자가 10년 넘게 쿠다 위에 쌓아 올린 코드는 다른 반도체로 옮겨 타기 어려운 강력한 잠금 효과를 만든다. 엔비디아는 특히 쿠다를 계속 업데이트해 6년 전 나온 구형 칩에서도 최신 프로그램을 쓸 수 있게 한다. 쿠다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엔비디아 생태계’다. 일반 전자제품이라면 새 모델이 나오는 순간 구형은 무용지물이 되지만, 엔비디아 생태계에서는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의 노화 속도를 인위적으로 늦추는 셈이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감가상각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느려진다는 뜻이다. 여기에 엔비디아는 리스 기간 내내 칩 가치가 최소 25%를 유지되도록 스스로 보증까지 서기로 했다. 예상보다 칩 가치가 떨어지면 그 손실을 엔비디아가 먼저 흡수하겠다는 뜻이다. 이 보증 덕분에 사모펀드는 칩 리스 채권을 여러 위험 등급으로 쪼개 파는 담보부대출채권(CLO)과 비슷한 구조로 증권화할 수 있다고 본다. 반도체가 부동산이나 항공기처럼 채권시장에서 거래되는 자산으로 격상되는 셈이다.
하지만 엔비디아의 순환금융 모델에는 몇 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첫째는 수요에 거품이 낄 수 있다는 우려다. 엔비디아의 순환금융으로 생기는 AI 투자 수요가 과연 진짜 수요인가하는 의문이다. AI 칩 공급자가 고객의 구매력 자체를 만들어주는 셈이니, 공급자의 매출 증가가 독립적인 최종 수요 때문인지 아니면 공급자 스스로 만들어낸 유동성 때문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이른바 ‘크레디트 래퍼(credit wrapper)’ 즉, 투자적격 등급의 대형 기업이 신용도가 낮은 신생 AI 기업의 차입에 사실상 보증을 서줘, 겉으로 보이는 수요와 실제 지급 능력 사이의 틈이 가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젠슨 황 “순환적이란 발상 터무니없어”
그래픽=정수경 기자
둘째는 결국 위험이 엔비디아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엔비디아가 고객에 투자하거나 보증을 서주고, 고객은 그 돈으로 다시 엔비디아의 AI 칩을 사는 구조는 처음에는 수요를 만드는 촉매 역할을 하겠지만, 고객이 기대만큼 수익을 내지 못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미국의 클라우드 전문 기업인 코어위브는 엔비디아의 투자를 받아 엔비디아 칩을 대량 구매했다. 그 결과 249억 달러의 부채가 생겼는데, 이 부채를 일으킨 장본인이 엔비디아인 것이다. 만약 코어위브 같은 고객사의 실적이 부진해지면, 엔비디아는 매출 채권을 제때 회수하지 못하거나 보증 채무를 그대로 이행해야 하는 재무적 부메랑을 맞을 수 있다. 위험을 고객에게 넘긴 줄 알았는데, 결국 한 바퀴 돌아 공급자 자신의 대차대조표로 되돌아오는 구조인 셈이다.
셋째는 닷컴버블 붕괴 트라우마다. 25년 전에도 통신장비업체가 신생 인터넷 기업에 자금을 대주고, 그 기업이 다시 장비를 사들이며 서로의 매출을 부풀리다가 수요가 꺾이자 동시에 무너진 전례가 있다. 이른바 닷컴버블의 붕괴. 엔비디아의 순환금융 구조가 그때와 판박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2025년 이후 발행된 AI 관련 부채는 5700억 달러를 넘어섰고, 최근 데이터센터 개발 채권은 연 7.53%라는 높은 금리를 제시하고서야 겨우 팔렸다.`지출은 늘고 현금흐름은 줄어드는데 조달 비용은 오르는 이 불균형이, 닷컴버블 때와 마찬가지로 언젠가 한꺼번에 청구서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게 회의론의 핵심이다.
그래픽=정수경 기자
물론 젠슨 황의 반박에도 나름의 논리가 있다. 그는 코어위브 투자를 두고 “이 기업이 궁극적으로 조달해야 할 자금 총액에 비하면 작은 비율일 뿐”이라며 “순환적이라는 발상은 터무니없다”고 말해왔다. 오픈AI에 제공하려는 보증도 데이터센터 임대와 건설에 필요한 부채에 한정되고, 정작 그 안에 들어갈 반도체 구매 대금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을 회사 측은 강조한다. 엔비디아는 분기마다 490억 달러에 이르는 사상 최고 잉여현금흐름을 창출하고 있어, 지금 당장 이 정도 위험을 감당할 여력은 충분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결국, 이 거대한 금융 구조물을 떠받치는 기둥은 하나로 모인다. 엔비디아의 칩이 정말로 감가상각을 비껴가고, 그만큼 수요가 꾸준히 이어지느냐는 것이다. 쿠다 생태계의 잠금 효과가 계속되는 한 지금의 리스와 보증, 증권화는 새로운 자산군을 만들어낸 혁신으로 기록될 것이다. 반대로 더 저렴한 경쟁 칩이 나오거나 모델이 개선돼 필요한 연산량이 줄어들면, 쿠다의 잠금 효과도 25%의 잔존가치 보증도 한꺼번에 시험대에 오른다. 앞으로 실적 발표 때마다 매출 숫자보다 데이터센터 가동률과 고객사의 실제 사용 실적을 더 예민하게 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도체 한 세대의 수명은 이제 기술이 아니라 금융의 문제가 됐다는 사실, 이것이 엔비디아 순환금융이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화려한 숫자 뒤에 가려진 이 구조를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지금 투자자와 정책 당국 모두에게 필요한 안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