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오늘날 전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으로 K컬처를 으뜸으로 치는데 의료보험 제도도 이에 못지않게 훌륭하다. 그건 ‘수준 높은 의술’을 ‘저렴한 비용’으로 ‘쉽게 접할 수’ 있어서다.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기란 쉽지 않은데 우리나라는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거의 유일한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준 높은 의술을 접하려고 해도 의료비가 비싸거나 아예 전문 의사를 쉽게 접할 수 없고, 반면에 전문 의사를 쉽게 접하거나 의료비가 싸지면 수준 높은 의술을 접하기 어려운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게다가 서양인은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한방치료도 저렴한 비용으로 받을 수 있다.
북과 체제 경쟁하던 박정희 결단
신현확이 꼼꼼히 챙겨 1977년 실시
현대·삼성 뛰어들어 의료 질 급성장
노무현·문재인 거치며 보장성 확대
최고 의료 혜택, 국가경쟁력에 일조
후대에도 품질 유지되게 고민해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내에 실물 복원한 광혜원 건물. [사진 김정탁]
‘요람에서 무덤으로’라는 의료복지 제도를 처음 도입한 영국은 의료비는 저렴할지 몰라도 의사를 만나기가 힘들뿐더러 의사 수준도 우리나라에 비해 나을 게 없다. 이에 반해 미국은 좋은 의료 인프라를 갖추었어도 의료비가 턱없이 비싸 암처럼 중병에 걸리면 웬만하면 치료를 포기한다. 그래서 미국 사는 교포도 한국에 와 제값 다 치르고 치료받는 게 낫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암을 치료하는데 한 해 치료비와 약값의 5%만 부담하니까 환자 부담이 거의 없다. 또 비싼 의료보험료로 골치 앓는 고용주에게 한국의 의료보험 제도는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국가경쟁력을 제고하는 데도 일조한다.
제중원을 계승한 대한의원 건물은 현재 서울대병원 본부 및 박물관으로 쓰인다. 박물관 뒤편 건물이 서울대병원. [사진 김정탁]
신현확의 결정적 역할 의료보험제도는 1977년에 처음으로 실시돼 역사적으로도 서구에 비해 오래되지 않는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고도 경제성장에 따른 빈부 간의 격차 해소를 위한 한 방편으로 의료보험 실시라는 결단을 내렸다. 그때만 해도 북한이 우리보다 더 좋은 의료보험 체제를 갖추었기에 남북한 체제 경쟁의 한 요소가 되었다. 그렇더라도 재정이 많이 투입되는 일이라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는데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이던 신현확(申鉉碻·1920~2007)이 이 난제를 잘 해결해 의료보험제도가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운영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신현확은 복지와 무관한 경제 기획 관료 출신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으로선 드물게 일본의 전시경제를 담당하던 군수성에서 수습 관료로 일했다. 해방이 되자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치다 한국전이 터지자 전시경제를 운용할 인재가 필요하다는 주위의 강권으로 인해 다시 관료의 길에 들어섰다. 그때 그는 서울로 올라오는 열차표를 구하지 못해 대구에서부터 석탄을 실은 화물칸에 앉아서 왔는데 얼굴은 물론이고 온몸이 시꺼먼 채로 서울역에 도착하자 마중 나온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어지간히 무던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부흥부 과장으로 들어간 지 8년 만에 장관이 되었으니 능력도 탁월했다. 그렇더라도 박정희가 의료보험 추진의 책임을 그에게 맡긴 건 의외였는데 임명권자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이를 잘 발전시킨 공을 세웠기 때문인지 경제부총리를 거쳐 총리까지 올랐다. 그는 부드러워도 카리스마를 지녔는데 이런 카리스마를 위해 독서를 통해 부단히 노력했다. 의료보험제를 추진할 때도 관련 책을 모조리 읽어 실무진을 압도했다. 의료보험제가 막상 실시되자 의료보장 혜택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일부의 비판이 있었어도 그 기대를 맞추면 재정이 빨리 고갈돼 균형을 맞추는 일이 중요했다.
헌법재판소 내에 있는 최초의 제중원 터.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한 사람인 홍영식의 집터였다. [사진 김정탁]
건강보험증 맡기고 외상 술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989년 드디어 전 국민이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은 대기업과 공무원 등으로 제한돼 건강보험증 소지 여부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양상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물이었다. 건강보험증을 맡기고도 외상 술이 가능했으니까 말이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분출된 민주화의 열기는 이런 가시적인 불평등의 증거물을 없애야 했는데 당시 대통령 후보 노태우는 ‘전 국민 의료보험 혜택’을 공약으로 내세워 이 혜택이 모든 국민에게 가능해졌다. 그전만 해도 치료비가 비싸 누구나 병원에 다닐 수가 없어 약국에 주로 의존했고, 그래서 ‘유전무병 무전유병’이란 말도 유행했다.
2005년 노무현 정부 때는 암 환자의 본인 부담률을 20% 수준으로 대폭 떨어뜨림으로써 암 치료는 국가가 책임지는 구조로 바뀌어 실질적인 의료보험제가 뿌리를 내렸다. 2013년 문재인 정부 때는 4대 중증 질환인 암·심장·뇌혈관·희귀질환의 보장성 강화를 이뤄내 제대로 된 의료보험제가 36년 만에 확립됐다. 이에 따라 우리 국민은 ‘수준 높은 의술’을 ‘저렴한 비용’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세 가지 조건 중에 ‘저렴한 비용’이라는 혜택을 먼저 누리게 되었는데 ‘수준 높은 의술’과 ‘전문 의사를 쉽게 접하는 일’은 여전히 숙제로 남았다.
그런데 1989년 현대그룹을 시작으로 해 삼성그룹도 병원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수준 높은 의술’과 ‘전문 의사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숙제마저 풀렸다. 두 그룹의 병원 사업 진출이 경쟁적으로 이루어진 데다 이들 병원의 등장이 다른 종합병원에도 영향을 줘 의료의 상향 평준화가 저절로 이루어져서다. 단적인 예로 예전에는 돈 많은 사람은 암 치료를 위해서 미국이나 일본으로 가곤 했는데 지금은 그런 일이 거의 없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의료 기술이 세계적 수준에 올라서인데 이는 무엇보다 병원끼리의 경쟁에서 비롯된 일이다.
을지로 입구 하나은행 본점 건물 뒤편에 재동에서 옮겨간 제중원이 있었다. [사진 김정탁]
서울대병원과 세브란스의 적통 논쟁 그런데 한의학 전통만 있던 우리나라에 서양식 근대 병원이 어떻게 출발했을까? 이를 두고도 서울대병원과 세브란스병원이 서로 경쟁한다. 서양식 근대 병원이 들어선 건 1885년(고종 22년)으로 광혜원이 문을 열었을 때다. 이 병원은 미국 북장로회 소속 의료선교사 알렌이 고종의 명을 받아서 서울 종로구 재동(현 헌법재판소 자리)에 설립했는데 2주 만에 제중원으로 개칭했다. 제중원으로 개칭한 뒤 환자가 넘쳐나 1년 후에 동현(지금의 을지로 입구)으로 이전했다. 그러니 제중원은 우리나라 근대 병원의 시작점인데 서울대병원과 세브란스병원이 제중원의 전통을 서로 잇는다고 주장한다.
제중원의 전통을 지금 어느 병원이 잇고 있는지는 몰라도 제중원은 단순한 병원을 넘어 우리 사회에 파장이 컸다. 천연두 예방접종 도입에 앞장서고, 위생 교육을 통해 전염병을 미리 예방함으로써 공공보건 체계의 기초를 잘 닦아서다. 그전에는 전염병이 돌면 병에 걸리는 걸 운명으로 알고 푸닥거리 말고는 어떤 조치를 하지 못해 많은 사람이 죽었다. 또 서양인 의사가 집도하는 외과수술이 의료 혁신을 가져와 의료의 질적 향상을 이끌어서다. 그리고 전문 의학 교육까지 이루어져 제중원은 전문 의료 인력 양성의 산실이 돼서다.
그렇지만 제중원의 가장 큰 공헌은 조선 사회에 오랫동안 뿌리내린 불평등한 계급 구조를 타파하는 데 앞장섰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는 치료받을 수 있는 의료기관이 신분별로 달라서 궁궐 안의 내의원은 왕실 가족 이외에는 치료받을 수 없었고, 전의감은 관리들이 이용하는 의료기관이었고, 혜민서만 백성들의 의료를 책임진 기관이었다. 물론 빈민 구제를 위해 설치된 활인서도 의료기관의 역할을 일부 수행했다. 그런데 구한말에 제중원이 설치되자 사대부 평민 빈민의 구분 없이 진료가 함께 이루어져 의료의 공공성이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이로부터 1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제중원이 추구한 공공성의 정신이 잘 이어져 와 의료보험제도가 안착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이 되었다. 그렇더라도 박정희의 결단과 신현확의 균형감각으로 인해 우리가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좋은 의료보장 혜택을 누린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그러니 당장의 혜택만 누릴 게 아니라 후대에도 이런 의료보장 제도가 잘 유지되게끔 지금부터 고민해야 한다. 그래도 아쉬운 건 경제 논리가 앞서 환자 중심적인 진료가 이루어지지 않아 환자가 공장에서 상품 찍어 나오는 듯한 취급을 받고, 또 의사 공급이 인기 있는 쪽으로만 몰려 필수과 전문의 분야가 소홀히 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