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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의 필향만리] 인생 이르는 곳마다 고수가 있다(莫道君行早 更有早行人)

중앙일보

2026.09.09 08:06 2026.09.09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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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

김병기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생존경쟁 즉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싸움을 한다. 특히 현대인들은 늘 자신이 아무리 앞섰다 해도 어디엔가는 자신보다 먼저 출발하여 앞서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불안과 강박관념에 매여 산다. 자승자박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한 자 남짓한 키의 외로운 소나무가 탑 아래에 서 있네. 탑은 높고 소나무는 낮아서 가지런하지가 않구나. 세상 사람들아! 소나무의 키가 작다느니 크다느니 함부로 말하지 마오! 훗날 소나무가 자라면 탑이 오히려 낮아질 것이니.”

莫:말 막, 道:말할 도, 早:이를 조. 그대가 먼저 출발했다고 말하지 마시게, 더 먼저 출발한 사람이 있으리니. 35x68㎝.

莫:말 막, 道:말할 도, 早:이를 조. 그대가 먼저 출발했다고 말하지 마시게, 더 먼저 출발한 사람이 있으리니. 35x68㎝.

전해오는 한시를 번역해 보았다. 원문은 “일척고송재탑저(一尺孤松在塔底), 탑고송저불상제(塔高松低不相齊), 청군막위송장단(請君莫謂松長短), 송장타일탑환저(松長他日塔還低)”이다. 현재 키가 작음을 한탄할 필요가 없다. 그저 부지런히 자라면 된다. 서두를 필요도 없고 남보다 앞서려고 안달할 필요도 없다. ‘죽어라’하고 앞서 뛰다가는 진짜 죽음 앞에 먼저 도착할 수 있다.

유홍준 교수(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명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의 부제는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이다. ‘인생은 닿는 곳마다 고수가 있다’는 뜻이다. 도처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음을 인지·인정하자는 겸손이 담긴 말이다. 욕심에 매몰되어 내가 반드시 ‘뛰는 놈’을 넘어 ‘나는 놈’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 삶이 피곤해질 수밖에 없다. 평생을 허덕이며 살기 때문이다. 이르다느니 빠르다느니 하는 말은 다 남과 나를 비교하는 차별심(差別心)으로부터 발생한다. 차별심이야말로 온갖 고통과 번뇌의 근원인 것이다. 진짜 나는 놈은 허덕임도 휩쓸림도 없이 자기중심을 잡고서 자신에게 집중하는 사람이다. 탑보다 키가 작은 소나무, 그저 꾸준히 자라는 사이에 행복은 스며오고, 그 행복이 언젠가는 탑보다 높아지는 영광도 안겨줄 것이다.

김병기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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