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아동보호시설 덕성원의 인권유린 피해자들이 2025년 12월 24일 부산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와 부산시를 상대로 제기했던 손해배상 청구 소송 승소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결혼해 주겠다, 투자하면 돈을 두 배로 불려주겠다”는 지인의 말에 속아 13억원을 건네자 지인이 잠적했다. 국가폭력 피해를 인정받고 받은 배상금 11억7000만원에 퇴직금과 적금, 대출금까지 끌어모은 전 재산이었다.
‘제2의 형제복지원’으로 불린 부산 아동보호시설 덕성원 피해자 정모(60)씨가 최근 겪은 일이다. 정씨는 지난 2월 26일 국가로부터 11억7000만원의 배상금을 받았다. 국가배상을 받은 덕성원 피해자 42명 가운데 세 번째로 많은 금액이었다. 13년간 덕성원에 감금됐다가 고등학교 졸업 후 나온 정씨는 배상금을 받은 지 두 달여 만에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의 말에 속아 3차례에 걸쳐 돈을 건넸다.
배상금 전액에 직장 퇴직금 1185만원, 적금 9400만원, 보험사 대출금 2600만원, 두 달 치 월급 800만원까지 모두 13억원가량이었다. 정씨는 “원룸 월세도 감당하기 어려워 고시원으로 옮길 처지”라며 상대방을 사기와 혼인빙자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 신모(60)씨도 거액의 배상금을 받은 뒤 석 달 만에 탕진했다. 신씨는 1978년 형제복지원에 들어가 6년 11개월을 살았다. 지난해 12월 받은 국가배상금 5억1000만원은 난생 처음 가져본 큰돈이었다.
평소 다니던 교회에 십일조로 6000만원을 냈고, 목사 2명에게 각각 2000만원씩 후원했다. 다른 교회에는 불우이웃을 위한 의류 등 5000만원어치를 지원했고, 알고 지내던 필리핀 선교사 등에게도 돈을 보냈다. 석 달도 안 돼 5억원을 모두 썼다. 자신을 위해 쓴 돈은 보증금 1000만원, 월세 45만원짜리 오피스텔로 이사한 것이 전부였다.
신씨는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은행 앱으로 숫자를 누르니깐 수천만원씩 보내도 실제 큰돈이라는 감각이 없었다”며 “형제복지원 퇴소 후 노숙 생활을 하고,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하지 못해 경제관념도 부족했다”고 말했다. 현재 그의 수입은 기초생활수급비 월 100만원이 전부다. 신씨는 “내가 스스로 후원한 것이니 사기를 당한 것은 아니지만, 국민연금처럼 나눠 받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1987년 부산 형제복지원에 강제 수용된 어린이들의 모습. [중앙포토]
또 다른 집단수용시설 피해자인 지적장애인 A씨는 국가로부터 13억원의 보상금을 받은 뒤 그동안 교류가 없던 가족이 나타나 재산 피해를 봤다. 가족이 A씨 명의로 주택 계약을 추진하면서 그의 돈으로 계약금을 지급했지만, 계약이 무산되면서 돈을 돌려받지 못했다. 이후 주변 도움으로 국민연금공단 재산관리지원서비스에 재산을 맡긴 뒤에야 추가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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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관리 능력 부족한 피해자 위한 ‘공공신탁제도’ 계류중
국가가 수십 년 전 가한 인권침해에 대해 거액의 배상금을 지급하고 있지만, 피해자들이 목돈을 안전하게 관리하며 삶을 회복하도록 돕는 제도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덕성원 피해자 변론을 맡았던 임재성 변호사는 “성인의 재산권을 국가가 강제로 관리할 수는 없다”면서도 “경제교육이 이뤄지고 있지만 사기 피해가 잇따라 발생하는 만큼 일시금 지급 방식을 보완할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종환 덕성원 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도 “장기간 시설에 수용됐던 피해자들은 재산관리와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배상금을 지급하는 데서 끝내지 않고 공공신탁 등을 통해 안정적인 삶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향직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대표와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들이 2024년 11월 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국가배상 손해배상 소송 2심 선고 공판 후 취재진에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스1]
현재 부산시는 국가배상금을 받은 집단수용시설 피해자를 대상으로 실생활 법률·자산관리 교육을 하고 있다. 부산시 자치행정과 관계자는 “법적으로 정부가 재산 관리를 강제할 근거가 없다”며 “공공신탁과 성년후견, 재산관리 서비스 연계 등을 담은 특별법이 국회 계류 중”이라고 말했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3월 고령·장애 등으로 보상금 관리가 어려운 국가폭력 피해자의 재산을 공공신탁기관에 위탁하는 법안을 담은 ‘집단수용시설 등 인권침해 피해자를 위한 특별법’을 발의했다. 남 의원은 “공공신탁제도는 국가배상금이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실질적인 피해 회복으로 이어지기 위한 장치”라고 말했다.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도 성년후견과 재산관리 서비스, 신탁 이용 등을 지원하는 특별법을 냈다. 두 법안 모두 단순한 금전 보상을 넘어 피해자의 실질적인 삶의 회복을 지원해야 한다는 취지다. 김 의원은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재산을 안전하게 관리하고 지역사회에서 삶을 다시 꾸려갈 수 있도록 국가가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며 “국가배상금 지급 사례가 늘고 있는 만큼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