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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일 뿐인데 물멍 되네”…13년 쏟아부은 신박한 ‘제철 사진’ [비크닉]

중앙일보

2026.09.10 14:00 2026.09.10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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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실대는 물결 위로 반짝이는 물비늘, 강변에 홀로 선 나무, 해가 진 뒤 푸르게 가라앉은 수면. 한강의 모습을 담은 사진 한장이 요즘 사람들의 시선을 붙들고 있다. 빠르고 자극적인 이미지가 쉴 새 없이 넘어가는 시대, 사람들은 왜 이 고요한 풍경에 멈춰서는 걸까.
한강의 물결과 빛을 드라마틱하게 포착하는 표기식 작가의 '한강 시리즈'. 사진 표기식, 그라운드시소 제공

한강의 물결과 빛을 드라마틱하게 포착하는 표기식 작가의 '한강 시리즈'. 사진 표기식, 그라운드시소 제공


사진을 찍은 주인공은 표기식(46) 사진가다. 영화·음반·잡지·브랜드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며 박보검·태연·강동원 등 셀럽부터 문인과 예술가까지 수많은 얼굴을 찍었다. 영화 ‘족구왕’ ‘고양이들의 아파트’ ‘영국 잡지 『모노클』 한국 특집편’ 등도 그의 손을 거쳤다. 누구보다 화려한 현장에서 일하지만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한강으로 향한다고 한다. 그렇게 한 그루의 나무를 1년 동안, 한강을 10년 넘게 뷰파인더에 담았다.

이렇게 쌓인 사진이 최근 입소문을 타고 있다. 지난해 서울 아트북 페어에서 처음 공개한 사진집 『biT(빛)』 도쿄 아트북 페어에서 준비한 물량이 전량 매진됐다. 지난 7월 도쿄 개인전 ‘윤슬’을 마친 그는 오는 23일부터 서울 중구 그라운드시소 센트럴에서 대규모 개인전 ‘빛은 어떻게 떨어졌길래 모두 다르게 반짝여서’를 연다.
한 해 동안 고양대덕 생태공원 근처 나무의 모습을 담았다. 표 작가는 지금도 쓸개 수술 때문에 낙엽이 떨어지는 순간을 놓쳤다며 아쉬워한다. 사진 표기식, 그라운드시소 제공

한 해 동안 고양대덕 생태공원 근처 나무의 모습을 담았다. 표 작가는 지금도 쓸개 수술 때문에 낙엽이 떨어지는 순간을 놓쳤다며 아쉬워한다. 사진 표기식, 그라운드시소 제공

디지털 피로 시대, 사진에 계절 담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제철 사진’이라고 부른다. 그날의 날씨와 습도, 빛의 양과 질감까지 사진에 한장에 고스란히 담는다. 누군가 무심코 지나칠 법한 풍경도 오랫동안 지켜보며 시시각각 달라지는 표정을 포착한다. 표 작가의 사진이 호응을 얻는 배경에는 ‘디지털 피로’가 있다. 지난 3월 한국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18~29세의 58%가 스스로 스마트폰에 중독됐다고 답했고, 전체 응답자의 62%는 디지털 디톡스에 참여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화면에서 벗어나 자연을 바라보는 일은 디지털 피로를 달래는 하나의 방법으로 떠오르고 있다.

정재은 영화감독과 함께한 '고양이들의 아파트'. 영화와 함께 2022년 사진집을 펴냈다. 철거 작업이 진행되는 둔촌주공아파트에 남겨진 고양이를 '휴먼스케일'이 아닌 '캣스케일'로 촬영했다. 사진 표기식, 그라운드시소 제공

정재은 영화감독과 함께한 '고양이들의 아파트'. 영화와 함께 2022년 사진집을 펴냈다. 철거 작업이 진행되는 둔촌주공아파트에 남겨진 고양이를 '휴먼스케일'이 아닌 '캣스케일'로 촬영했다. 사진 표기식, 그라운드시소 제공

물결을 바라보며 쉬는 ‘물멍’에는 과학적 근거도 있다. 2010년 영국 엑서터대 매튜 화이트 교수 연구팀은 물이 포함된 풍경이 심리적 회복감과 긍정적 정서를 높인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학계에서는 바다와 강, 호수처럼 물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주는 효과를 ‘블루 스페이스(Blue Space) 효과’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표 작가의 한강 사진을 보며 ‘물멍’한다고 말하는 이유도, 디지털 화면을 잠시 벗어나 자연에서 쉼을 얻으려는 시대적 필요와 맞닿아 있다.

표기식 작가는 한강의 물결과 빛을 쫓는다. 해의 각도와 바람에 따라 생겨나는 수면의 빛, 이른바 ‘윤슬’을 카메라에 담는다. 사진 표기식, 그라운드시소

표기식 작가는 한강의 물결과 빛을 쫓는다. 해의 각도와 바람에 따라 생겨나는 수면의 빛, 이른바 ‘윤슬’을 카메라에 담는다. 사진 표기식, 그라운드시소

13년 쏟아부었다…다채로운 한강의 표정들
" “...조용히 핸드폰 앨범을 열었다. 내가 찍은 한강 사진을 가만히 살펴보고 생각했다. 나의 한강은 사진이고, 표기식의 한강은 이야기라고.” "
배우 박정민이 사진집에 남긴 서평이다. 표 작가의 사진이 보여주는 건 그저 ‘예쁜 한강’만은 아니다. 색도, 물결의 모양도 사진마다 제각각이다. 한강이 이토록 다채로웠나 싶게 만든다. 그는 “특별한 기술이나 기획으로 찍은 게 아니다”라며 “촬영을 거듭하며 날씨와 빛, 시간대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환경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됐다”고 말했다.

시작은 지난 2013년이었다. 아이돌 그룹 샤이니의 앨범 표지를 촬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예상과 달리 일이 들어오지 않던 시기였다. 마음을 다잡으려 찾은 한강에서 유독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1년간의 프로젝트가 끝난 뒤에도 한강 촬영은 계속됐고 13년이 흘렀다. 이제는 하늘만 봐도 어느 대교에서 어떤 각도로 찍어야 할지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다.

표기식 작가는 홍익대 멀티미디어 디자인을 전공한 뒤 영상 제작을 업으로 삼다 2013년 사진가로 데뷔했다. 다양한 문화 및 브랜드 사진 작업을 진행하는 한편, 2014년 '플랫폼 플레이스 629'에서 열린 나무 프로젝트 전시를 계기로 꾸준히 개인작업을 선보였다. 사진 표기식 제공

표기식 작가는 홍익대 멀티미디어 디자인을 전공한 뒤 영상 제작을 업으로 삼다 2013년 사진가로 데뷔했다. 다양한 문화 및 브랜드 사진 작업을 진행하는 한편, 2014년 '플랫폼 플레이스 629'에서 열린 나무 프로젝트 전시를 계기로 꾸준히 개인작업을 선보였다. 사진 표기식 제공

한영수를 비롯한 사진가들이 1950~60년대부터 한강을 배경으로 사람과 건축물, 당대의 풍경을 기록했다면 표 작가는 오직 빛과 물결에 집중한다. 그는 “일부러 요소를 없앤 건 아니고 처음부터 빛과 물결에 집중했다”면서“다른 나라나 지방의 강도 찍어봤지만 느낌이 아주 다르다”면서 “한강은 정비사업을 거치며 연중 수위가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되고, 강폭도 넓어 물의 일부만 화면 가득 포착할 수 있다”고 했다.

‘오류’마저 작품이 됐다
표 작가의 시그니처 중 하나는 색색의 선이 사진 일부를 긁고 지나간 듯한 이미지다. 언뜻 필름카메라의 ‘빛샘’을 떠올리게 하지만, 실제로는 메모리 카드 리더기의 오류로 생긴 흔적이다. 일종의 ‘디지털 빛샘’인 셈이다. 보통이라면 삭제했을 실패작이지만, 그는 우연히 생긴 오류까지 사진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SD카드 리더기의 작동 불능으로 생긴 오류를 작업으로 삼았다. 이를 눈여겨본 당시 YG의 아트디렉터가 이찬혁 1집 앨범 촬영을 제안했다. 사진 표기식, YG엔터테인먼트

SD카드 리더기의 작동 불능으로 생긴 오류를 작업으로 삼았다. 이를 눈여겨본 당시 YG의 아트디렉터가 이찬혁 1집 앨범 촬영을 제안했다. 사진 표기식, YG엔터테인먼트

우연과 오류는 이전부터 그의 작업에 자주 개입했다. 샤이니를 촬영할 때는 필름 약 130통을 사용하면서 아날로그 특유의 질감을 살리기 위해 카메라 뒤판을 열어 필름에 일부러 빛을 들이는 실험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의도하지 않게 생긴 사진에서도 그는 ‘예쁜’ 패턴을 발견했다. 이 ‘에러’ 시리즈는 2022년 발매된 이찬혁(악동뮤지션)의 첫 솔로 앨범 『ERROR』의 표지 작업으로도 이어졌다.

사진가는 ‘무엇을 보는가’를 성찰하는 사람
상업사진이든 개인 작업이든 그의 사진에는 ‘표기식답다’고 느끼게 하는 특별한 인장이 있다. “사진을 보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팬으로서 여러 화보를 봤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같은 반응이 따라붙는 이유다. 브랜드도 그의 고유한 시선을 찾는다.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는 10여 년 전 인연을 맺은 뒤 지금까지 꾸준히 촬영을 맡겨왔다.

박보검의 아시아투어 일본 싱글(2019), 파타고니아와 함께 제주에서 이효리의 모습을 담았다(2022). 사진 표기식 홈페이지 캡처

박보검의 아시아투어 일본 싱글(2019), 파타고니아와 함께 제주에서 이효리의 모습을 담았다(2022). 사진 표기식 홈페이지 캡처


지난해부터 예스24와 함께 촬영한 문인들의 초상도 최근 100명을 넘어섰다. 일본 교토 출장 중에는 나무가 쓰러지거나 고사한 자리에 생긴 ‘숲틈’을 우연히 발견해 카메라에 담았다. 이 사진은 지난 2016년 출간된 나쓰메 소세키의 『긴 봄날의 소품』 표지가 됐다.

그에게 요즘 사진가의 경쟁 상대는 누구인지 물었다. AI도, 다른 사진가도, 사람들의 흐려진 집중력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무거운 촬영 장비를 들고 다니며 어깨와 목이 틀어지고, 매달 작업실 임차료를 걱정해야 하지만, 찍는 즐거움은 무엇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토 아라시야마 산에서 우연히 발견한 거대한 '숲틈'. 표 작가는 이를 '홀 오브 페임(Hole of Fame)' 시리즈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오른쪽은 나쓰메 소세키의 '긴 봄날의 소품'. 사진 표기식

교토 아라시야마 산에서 우연히 발견한 거대한 '숲틈'. 표 작가는 이를 '홀 오브 페임(Hole of Fame)' 시리즈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오른쪽은 나쓰메 소세키의 '긴 봄날의 소품'. 사진 표기식

무엇을 찍을지 안다는 것은 곧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는 뜻이기도 하다. 길가에 솟은 어린나무, 방치된 아파트 단지를 거니는 고양이처럼 남들이 지나치는 것에 마음을 쓰고 안위를 궁금해하는 태도는 결국 사진에 고스란히 배어난다. 사람들이 그의 사진에 빠져드는 건, 그 시선이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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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크닉이 브랜드라는 최고의 상품을 만들어내는 무대 뒤편의 기획자들을 만납니다. 브랜드의 핵심 관계자가 전하는 ‘오피셜 스토리’에서 반짝이는 영감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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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진([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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