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에 따르면 거대한 세력 판이 흔들리면 판의 주변부가 서로 부딪히면서 먼저 요동친다. 미·중 전략경쟁시대를 맞아 유럽판에서는 4년째 이어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판에서는 치킨게임에 돌입한 미국·이스라엘-이란 및 대리세력 전쟁, 아시아판에서는 대만을 둘러싼 중·일 갈등 심화와 북한의 중·러·이란 연대 강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사우디아라비아·튀르키예·파키스탄의 이른바 ‘이슬람판 나토(NATO)’라고 불리는 ‘메카 방위동맹(Mecca Defence Alliance)’의 출범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집권 후 첫 남쿠릴열도(일본명 북방영토) 방문에 따른 러·일 긴장 고조는 최신 사례다.
지정학 급변, 세력판 주변부 충돌
미국 불신에 ‘이슬람판 나토’ 출범
이집트 등 외연 확장 적극 나서
중·러 밀착 속에 러·일 갈등 고조
지난달 7일 메카 공동 방위협정에 서명한 3개국 정상들. 왼쪽부터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 셰바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 [AFP=연합뉴스]
나토 5조 원용해 공동 방위 선언 지난달 7일 이슬람의 성지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서 사우디, 튀르키예, 파키스탄 3국은 공동 방위협정을 체결했다. 31일엔 장관급 회의를 개최해 이 협정을 ‘메카 방위동맹’이라고 공식 명명했다. 이슬람 국가 간의 사상 첫 집단안보조약이 체결된 것이다. 이로써 사우디의 막대한 석유자본, 나토 회원국 중 2위인 튀르키예의 병력 규모와 방산 역량, 파키스탄의 핵무기와 축적된 정보·대테러 경험이 결합했다.
이번 동맹의 출범 원인은 3국의 안보 불안이다. 세계 경찰국가로서 미국의 대중동 안보공약은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현저하게 약화하고 있다. 이번 이란전쟁에서 보듯 이란과 이스라엘의 충돌은 주변국을 원치 않는 전쟁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 전쟁을 막기 위한 국제법과 유엔 안보리는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진 지 오래다. 이에 따라 메카 동맹은 회원국 중 한 나라가 무력 공격을 받을 경우 이를 전체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는 나토 조약 5조를 원용했다. 여기에 같은 수니파 이슬람 국가라는 정체성은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대중적 호소력을 갖고 있다.
원래 세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는 핵심 적대국은 각각 다르다. 사우디는 시아파 이슬람국의 수장인 이란과 예멘의 후티 반군과 같은 이란의 대리세력이다. 튀르키예는 유럽에선 그리스와 오랜 긴장 관계이지만, 최근엔 이스라엘을 더 큰 안보 위협으로 보고 있다. 이슬람국가 중 유일한 핵보유국인 파키스탄의 숙적은 인도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메카 동맹은 공동의 적(나토의 경우 러시아)에 대항하는 동맹이라기보다는 각 회원국의 안보 불안을 억제하기 위한 거래형·기능형 안보연대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3개국은 “이 동맹은 확장을 위해 세워졌다”라고 선언할 정도로 외연 확장에도 적극적이다. 현재 이집트, 방글라데시, 말레이시아 등이 참여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파키스탄, 사우디 경고 이란에 전달 메카 동맹은 출범하자마자 곧바로 회원국의 안보 위협에 대응했다. 지난 9일 파키스탄은 사우디 원유 수출의 핵심 통로인 홍해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둘러싸고 후티 반군과 사우디 주도 연합군 간의 교전이 치열한 가운데 이란에 후티를 통제하라는 사우디 측의 경고를 전달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소식통들은 미국-이란 간 종전 협상을 중재할 정도로 이란과의 소통 채널을 유지하고 있는 파키스탄이 ‘후티를 제어하지 않으면 대리전이 더 넓은 역내 안보 위기로 번질 위험이 있다’는 명확한 입장을 이란에 밝혔다고 한다.
카와자 아시프 파키스탄 국방부 장관은 자국 TV에 “한 국가에 대한 침략은 3개국 모두에 대한 침략으로 간주할 것”이라며 공동 방위협정 발동의 첫 사례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효과는 미지수다. 인남식 국립연구원 전략지역연구부장은 최근 보고서에서 “세 나라를 묶은 것은 누구도 자신들을 끝까지 지켜주지 않을 수 있다는 공통의 안보 불안”이라며 “향후 메카 동맹의 성패는 지켜봐야겠지만, 중요한 점은 이들이 더는 미국, 이란, 이스라엘이 만드는 질서에 수동적으로 끌려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는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멀어지는 아베의 영토 반환 꿈 아시아판의 주변부에선 러·일 간에 북방영토를 둘러싼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대만 유사시 개입 발언으로 중·일 갈등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와 북한은 각각 북방영토와 ‘비핵화 3원칙’ 폐기 움직임을 매개로 일본을 압박하는 방식으로 중국을 지원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일본과의 영유권 분쟁지역인 남쿠릴열도 4개 섬 중 하나인 이투루프(일본명 에토로후)를 전격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일본은 우크라이나 사태의 근본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러시아에 일방적인 제재를 가했다”며 일본이 방위백서에서 러시아를 위협 요인으로 지목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비판했다.
지난 4일 러시아 극동 하바롭스크에 세워진 대일전승기념비. 러시아 병사가 일본을 상징하는 국화 문장을 부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연합뉴스]
러시아는 일본의 예견된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러시아 태평양함대는 쿠릴열도 연안 인근에서 미사일 훈련을 한 데 이어, 지난 4일엔 극동 하바롭스크에서 열린 대일전승기념식에서 일본을 상징하는 국화 문장이 새겨진 표석을 파괴하는 소련군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제막식을 열어 일본을 자극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일본 국민감정에 관한 문제로 러시아 측에 설치 중단 또는 철거를 강하게 요청했다”고 밝혔지만, 오히려 러시아 외교부는 “바람에 불지 말라고, 태양에 빛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이라며 일축했다.
쿠릴 4개 섬은 1855년 러·일 조약에 따라 원래 일본 영토였으나 1945년 태평양전쟁 막바지 러시아가 장악한 뒤 일본 주민을 추방하고 병력을 파견해 실효 지배해왔다. 일본은 2012년 재집권한 아베 신조 전 총리 시절 1956년 양국 간 국교 회복을 위한 공동선언과 경제 협력 강화를 지렛대 삼아 4개 섬 중 홋카이도에 인접한 하보마이와 시코탄을 먼저 넘겨받은 뒤 나머지 2개 섬을 추후 인도받는 쪽으로 협상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북·중·러 연대 강화 움직임 속에 이런 아베 전 총리의 영토 반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는 흐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