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암호화폐 시장의 제도화에 제동이 걸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일가의 코인 사업을 둘러싼 이해충돌 논란 끝에 클래리티법이 상원에서 막혔다.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관련 주가가 일제히 급락했다.
미 상원은 15일(현지시간) 암호화폐 시장구조법인 ‘클래리티법(Clarity Act)’ 심의를 시작하기 위한 토론종결 표결을 실시했지만 찬성 49표, 반대 50표로 부결했다. 본회의 논의를 진행하려면 상원의원 5분의 3인 60명의 찬성이 필요했다. 민주당의 찬성표를 확보하지 못한 데다 공화당에서도 이탈표가 나왔다.
클래리티법은 약 2조3000억 달러 규모 미국 암호화폐 시장의 ‘룰북’(규제 지침)을 새로 짜는 법안이다. 암호화폐를 포함한 디지털 상품에 대한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의 관할을 명확히 하고, 디지털 자산 관련 투자 계약 등에 대한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관할 범위를 구분하는 것이 핵심이다. 암호화폐 거래소 등 사업자의 등록과 고객 보호 기준도 마련한다.
클래리티법
암호화폐 업계가 클래리티법을 최우선 입법 과제로 밀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떤 토큰과 거래가 증권법 적용 대상인지 법률로 명확히 해 규제 불확실성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장기 투자와 기관자금 유입이 늘어날 것으로 관련 업계는 기대해왔다. 로이터에 따르면 암호화폐 업계는 올해 관련 정치 활동에 최소 1억9000만 달러를 투입했다.
트럼프 행정부도 법안 처리를 강하게 밀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코인베이스·로빈후드·크라켄 등 암호화폐 업계 최고경영자(CEO)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이제 의회가 다음 단계로 공정한 버전의 클래리티법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도 지난 9일 “모두 협상 테이블에 남아달라”고 상원의원들에게 공개적으로 촉구하며 “통과시키지 못하면 동맹과 적대국 모두에 우려스러운 신호를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입법의 최대 걸림돌은 정작 트럼프 일가의 암호화폐 사업이었다. 트럼프가 지난해 신고한 가족 암호화폐 사업 관련 수입은 14억 달러를 넘었다. 월드리버티파이낸셜(WLF)과 자신의 이름을 딴 밈코인($TRUMP) 등이 대표적이다. 로이터는 백악관 복귀 이후 트럼프 일가가 주요 암호화폐 사업으로 최소 23억 달러를 벌어들인 것으로 추산했다. 민주당은 “대통령과 가족이 관련 사업에서 막대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진 만큼 더 강한 이해충돌 방지 장치가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트럼프 측은 가족 사업의 일상적인 운영에 관여하지 않는다며 이해충돌 주장을 부인해왔다.
공화당은 막판 수정안에서 민주당 요구를 반영해 126곳을 손봤다. 연방 공직자의 디지털자산 발행을 제한하고 주 법무장관의 윤리규정 집행권을 확대하는 내용도 담았다. 그러나 민주당은 대통령의 암호화폐 보유와 수익을 차단하기에 여전히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은행권 역시 스테이블코인에 이자나 보상이 붙으면 예금이 빠져나가 지역은행의 대출 여력이 줄 수 있다며 일부 조항에 반대했다.
입법 진전 기대가 꺾이자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비트코인은 장중 5.3% 떨어진 7만4910달러까지 밀리며 6월 이후 최대 장중 낙폭을 기록했다. 이더리움도 한때 8% 넘게 하락했다. 뉴욕증시에서는 암호화폐 거래소 코인베이스가 10.1%, 비트코인 보유 기업 스트래티지가 5.4% 떨어졌다. 국내 증시에서도 16일 장중 우리기술투자(-7.6%)·다날(-10.2%)·카카오페이(-11.4%) 등 관련주가 동반 약세를 보였다.
클래리티법
여기에 국제유가 상승과 미 10년물 국채금리 5% 돌파 등 거시 악재도 겹쳤다. 시장이 연방준비제도(Fed)의 추가 금리 인상 가능성을 높게 반영하면서, 클래리티법 좌초와 긴축적인 금융환경이 함께 암호화폐 가격의 하방 압력을 키웠다.
클래리티법 자체가 폐기된 것은 아니다. 톰 틸리스 공화당 의원은 당초 찬성에서 반대로 표를 바꿨다. 부결된 안건을 다시 심의하기 위한 절차를 밟을 수 있도록 재표결 가능성을 남겨둔 것이다. 그러나 의회가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곧 워싱턴을 떠나는 만큼 로이터는 “법안이 당분간 ‘얼어붙은(on ice)’ 상태가 됐다”고 전했다.
브라이언 암스트롱 코인베이스 CEO는 표결 직후 “SEC와 CFTC는 현행 권한 아래 명확한 규칙을 만들 수단을 갖고 있다”며 규제당국이 관련 작업을 이어갈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코너 하우 엔소 CEO는 “관망 중인 은행과 자산운용사들은 다음 규제기관장이 들어선 뒤에도 살아남을 규칙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의회 입법이 없는 한 정권 교체 때 규제 방향이 다시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