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 GPT와 딥시크가 보여준 인공지능(AI) 경쟁의 무대가 이제 반도체와 서버, 단말기로 넓어지고 있다. 중국이 향후 5년간 AI를 떠받칠 ‘하드웨어 생태계’를 국가 차원에서 키우겠다는 청사진을 내놨다. 중국 공업정보화부와 국가발전개혁위원회는 15일 ‘전자정보제조업 발전 15·5 계획(2026~2030년)’을 발표하고 2030년까지 규모 이상 전자정보 제조기업의 매출을 약 30조 위안(6103조원)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다. 연구개발(연구·개발) 투자 비중도 3.5%까지 높인다. 전자정보 제조업은 이미 중국 41개 공업 업종 가운데 13년 연속 매출 1위를 기록한 최대 제조업종이다.
이번 계획은 단순히 산업 규모를 더 키우겠다는 계획이 아니다. 중국 정부는 계획의 목적을 ‘AI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 것(筑牢人工智能根基)’이라고 명시했다. AI 경쟁에서 모델의 성능 못지않게 그 모델을 학습시키고 작동시킬 칩과 서버, 저장장치, 통신망과 단말까지 얼마나 자기 손으로 확보할 수 있느냐가 중요해졌다는 의미다.
중국의 스마트 제조라인에서 작동중인 로봇팔. 바이두캡쳐
GPU부터 RISC-V까지…AI의 ‘몸’을 만든다
계획에 담긴 17개 중점 과제를 따라가 보면 중국이 어디를 약점으로 보고 있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첫머리에 등장하는 것이 집적회로 전 산업망이다. 고성능 프로세서와 고밀도 메모리에서 제조, 첨단 패키징, 장비·소재·부품, EDA(전자설계자동화)와 반도체 IP까지 공급망 전반의 기술력을 높이겠다고 했다. AI 분야에서는 GPGPU와 ASIC, SoC의 연산 능력을 높이고 AI 훈련·추론 장비와 엣지 컴퓨팅 칩, 고성능 메모리까지 함께 개발한다. 수십만 개의 AI 가속기를 연결하는 초대형 지능형 컴퓨팅 클러스터도 계획에 포함됐다. 눈에 띄는 것은 RISC-V다. 중국 정부는 오픈소스 명령어 아키텍처인 RISC-V의 연구개발과 산업화를 명시하고 AI와 임베디드 시스템에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광자 기술도 별도의 중점 분야로 올렸다. 고성능 레이저와 광통신, 광소자 등을 육성해 기존 반도체 기술과 결합한다는 구상이다. 중국 정부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국산 GPU 하나’가 아니다. 칩 설계에서 제조, 메모리, 서버, 통신, 운영체제와 AI 모델까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자체 생태계에 가깝다.
이런 방향은 미국의 첨단 반도체 수출통제 이후 중국이 지난 몇 년간 겪은 경험과 맞닿아 있다. 첨단 GPU 한 종류를 국산화한다고 AI 자립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계 소프트웨어와 제조 장비, 고대역폭메모리(HBM), 첨단 패키징, 고속 인턴 커넥트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막히면 전체 시스템의 성능이 떨어진다. 중국이 이번 계획에서 ‘하드웨어 선행(硬件能力先行)’과 ‘소프트웨어·하드웨어 협동’을 동시에 강조한 이유다. 시장의 전망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모건스탠리는 중국 AI 칩 자급률이 2024년 33%에서 2030년 76%까지 상승하고, 중국산 AI칩 매출은 같은 기간 약 8조7000억원에서 약 74조원으로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중국 정부가 제시한 목표가 아니라 투자은행의 전망이지만, 화웨이와 캠브리콘, 무어스레드 등 중국 AI칩 기업들이 수출통제에 따른 ‘대체재’에서 자체 생태계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첨단칩만 볼 때 놓치는 중국의 또 다른 힘
중국 반도체를 볼 때 5나노, 3나노 같은 최첨단 공정에만 시선을 두면 또 다른 변화를 놓칠 수 있다. 중국은 첨단 공정에서는 여전히 미국·대만·한국과 기술 격차가 있지만 자동차와 가전, 산업기기에 광범위하게 쓰이는 성숙 공정에서는 이미 생산능력을 빠르게 늘리고 있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22~40나노 공정에서 중국의 세계 생산능력 비중은 2024년 25%에서 올해 37%, 2028년에는 42%까지 높아질 전망이다. SMIC는 이미 세계 파운드리 시장 3위에 올라섰다. 설계 소프트웨어에서도 변화가 시작됐다. 중국 주요 EDA 업체들의 중국 내 시장 점유율은 2020년 7%에서 2023년 14%로 두 배가 됐다. 아직 미국 기업들이 중국 EDA 시장의 약 80%를 장악하고 있지만, 중국이 가장 취약했던 영역에서도 국산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다.
한국과 직접 맞닿는 곳은 메모리다. 중국 D램 업체 창신메모리(CXMT)는 올해 2분기 글로벌 D램 매출의 10%를 차지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4%에서 1년 만에 두 배 이상으로 높아졌다. KDI가 소개한 분석에 따르면 범용 D램에서 한국과 중국의 기술 격차는 약 3년, HBM은 약 6년으로 추정된다. YMTC도 낸드플래시 분야에서 글로벌 선도기업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국의 목표가 당장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최첨단 HBM에서 추월하는 것이라고만 보면 이 변화의 절반밖에 보지 못한다. 범용 메모리와 성숙 공정에서 먼저 생산능력과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고, 그 위에서 첨단 제품으로 올라오는 것이 중국 제조업이 태양광·배터리·전기차에서 이미 보여준 방식이기 때문이다.
중국 안후이성 허페이시 쿵강 산업단지에 자리한 창신메모리(CXMT) 본사 모습. 중국 최대 메모리칩 제조사인 CXMT는 이날 상하이 증시에 상장해 공모가 대비 470% 급등했다. AFP
더 무서운 것은 ‘기술격차’보다 생태계의 속도
이번 계획이 한국에 던지는 질문도 여기에 있다. 한국은 HBM과 첨단 메모리에서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고 있지만 중국이 구축하려는 것은 개별 반도체 하나가 아니라 AI 모델과 칩, 메모리, 서버, 운영체제, 데이터센터와 스마트 단말이 연결되는 거대한 내수 생태계다. 중국 기업이 최첨단 GPU에서 엔비디아를 당장 따라잡지 못하더라도 자국 AI 모델을 자국 칩에서 돌리고, 중국산 서버와 메모리를 사용해 데이터센터를 구축해 그 AI를 스마트폰·자동차·로봇에 탑재할 수 있다면 기술격차와 시장점유율의 관계도 달라질 수 있다. 최고 성능의 칩을 만드는 경쟁과 충분한 성능의 칩을 거대한 시장에 가장 싸고 빠르게 공급하는 경쟁은 서로 다른 게임이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식 산업정책에는 익숙한 위험도 있다. 지방정부와 국유자본이 같은 산업에 한꺼번에 몰리면 중복투자와 공급과잉이 발생할 수 있다. 태양광과 디스플레이에서 나타났던 가격 급락과 구조조정이 반도체에서도 반복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중국 정부가 이번 계획에서 산업 모니터링과 지역 간 배치 최적화, 산업 거버넌스를 별도의 과제로 넣은 것도 이런 문제를 의식한 것으로 읽힌다.
그럼에도 이번 15·5 계획이 보여주는 방향은 분명하다. 중국은 AI를 더는 ‘좋은 모델을 누가 먼저 만드느냐’의 경쟁으로만 보고 있지 않다. 딥시크가 적은 연산 자원으로 강력한 모델을 만드는 방법을 보여줬다면, 이제 국가 산업정책은 그 모델을 중국산 칩에서 학습시키고 중국산 서버에서 돌려 중국산 스마트폰과 자동차, 로봇에 넣는 데까지 시선을 넓히고 있다.
AI 경쟁의 다음 승부처는 모델 하나의 성능이 아니라 그 모델을 떠받치는 산업 전체를 누가 가지고 있느냐가 될 수 있다. 중국의 30조 위안 계획에서 한국이 봐야 할 것도 바로 그 지점이다. 중국이 가장 좋은 칩을 언제 만드느냐보다, 충분히 좋은 칩과 메모리·서버·단말을 하나의 생태계로 묶는 시간이 얼마나 빨라지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