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쩍 선선해진 가을, 서울 도심은 물론 전국 곳곳에서 ‘야행’ 프로그램이 속속 열리고 있다. 이달부터 다음 달까지 이어지는 ‘경복궁 별빛야행’과 ‘창덕궁 달빛기행’은 예약 창이 열리기 무섭게 마감돼 ‘피켓팅’으로 불릴 정도다. 조명을 밝힌 고궁에 궁중음식과 전통 공연을 결합해 낮에는 경험할 수 없는 풍경을 만든 덕분이다. 최근에는 미술관과 도서관, 한강까지 해가 진 뒤 문을 연다. 지금 도시는 새로운 공간 대신 ‘밤’이라는 시간을 개발하며 야간경제를 키우고 있다.
궁궐 야행의 원조인 창덕궁 달빛기행은 2010년 시작됐고, 2016년 국가유산청이 전국 '국가유산 야행' 사업으로 확대했다. 경복궁 별빛야행은 2016년부터 매년 봄과 가을 운영되며, 회차당 약 30명의 인원만 받고 있어 예매 경쟁이 치열하다. 사진 국가유산진흥원
술 대신 미술관 관람하고 달린다
이전까지 ‘밤 문화’라고 하면 술자리나 유흥을 떠올리는 일이 많았다. 최근에는 낮에 하던 문화생활을 퇴근 후까지 이어가는 추세다. 미술관과 박물관은 문 닫는 시간을 늦추고, 한강과 도심에서는 야경과 역사를 결합한 체험 행사가 열린다. 서울시 주요 문화시설을 매주 금요일 야간 개방하는 ‘문화로 야금야금’과 전문 코치와 함께 도심을 달리는 ‘7979 서울 러닝크루’ 등이 대표적이다.
평일 대부분을 회사와 학교에서 보내야 하는 직장인과 학생에게 야간 개장은 매력적인 선택지다. 지난 11일 퇴근 후 서울시립미술관을 찾은 직장인 김승원(35)씨는 “주말에는 사람이 붐비고 약속도 많아 전시를 보러 가기 어려운데, 퇴근 후 갈 곳이 생겨 좋았다”며 “전시를 본 뒤 주변에서 저녁을 먹고 산책까지 하니 평일 하루가 길어진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뮤지엄나이트' 행사와 시내 야간 명소를 함께 달리는 ‘7979 서울 러닝크루’ 프로그램. 사진 서울시
밤 문화의 반경도 넓어졌다. 과거 퇴근 후 발걸음이 번화가의 식당과 술집에 집중됐다면, 이제는 궁궐과 미술관, 한강, 골목 상권까지 선택지가 다양해졌다. 지난해 서울연구원의 ‘쿨한 야간관광도시 서울’ 조사에서 서울시민의 78.8%가 최근 1년간 야간활동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공간 아닌 시간을 늘렸다
이러한 흐름은 서울만의 현상이 아니다. 지역에서는 국가유산에 공연과 전시, 체험을 결합한 야행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올해 국가유산청이 지원 대상으로 선정한 ‘국가유산 야행’은 전국 55건에 달한다. 이중 수원 국가유산 야행은 올해 약 26만명이 다녀가며 하루 평균 관람객이 약 2.5배 늘었다.
올해 10회를 맞은 수원 국가유산 야행. 지난 8월 14일부터 16일까지 열린 본행사에 26만4000여 명이 방문하면서 일부 프로그램은 30일까지 연장 운영됐다. 사진 수원시
지자체 입장에서는 새로운 시설을 짓는 것보다 기존 자원의 운영시간을 늘리는 편이 효율적이다. 공간을 확장하는 대신 시간을 확장해 관광객의 체류 시간과 소비를 늘리려는 전략이다. 야간 행사가 저녁 식사와 숙박 소비로 이어질 경우 당일 관광객을 체류형 관광객으로 바꾸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대중교통과 상권, 비교적 안전하게 야외 활동을 할 수 있는 한국의 도심 환경도 야간 문화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으로 꼽힌다.
사람들은 왜 밤을 다시 보기 시작했을까. 야간문화 전문가인 루츠 라이센링(Lutz Leichsenring) 바이브랩 공동대표는 “팬더믹 기간 야간 산업이 심각한 타격을 받으면서 세계 각 도시가 밤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며 “야간문화를 단순히 허가하고 규제할 대상이 아니라, 정책적으로 계획하고 육성할 가치가 있는 경제 영역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도시가 제공하는 ‘밤의 질’은 생활비나 일자리 시장과 함께 도시 경쟁력을 좌우하는 요소가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2018년 도시의 밤 문화를 조사하고 야간경제 정책을 연구·자문하는 ‘바이브랩(VibeLab)’을 공동 설립했다. 그동안 베를린의 야간 전략 수립에 참여하고 런던의 밤 문화 실태를 조사하는 등 세계 여러 도시의 지속 가능한 정책을 설계·자문해왔다.
‘야간 공무원’까지…전 세계 주목하는 야간경제
서울시가 지난달 20일 ‘서울형 야간경제’ 구상을 발표한 것도 이러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 도시 차원에서 문화와 여가를 안전하고 쾌적하게 누릴 수 있도록 교통과 안전, 편의시설을 보완하고 야간 콘텐트를 확충한다는 계획이다. 서울시는 서울형 야간경제를 통해 5년 뒤 야간 소비를 5조원 추가로 창출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서울시에 따르면, 야간에 발생하는 카드 소비액은 하루 평균 3118억원으로 단순 환산하면 연간 약 113조에 달한다. 사진 서울시
일부 해외 도시는 아예 야간문화를 전담하는 사람까지 뒀다. 영국 런던에는 시장이 임명하는 야간정책 책임자인 ‘나이트 차르(Night Czar·야간 책임자)’가 있다. 뉴욕과 암스테르담에는 ‘나이트 메이어(Night Mayor·야간 시장)’가 도시 행정과 야간문화 업계, 주민 사이를 연결한다. 운영 방식은 다르지만, 야간산업을 육성하는 동시에 소음과 치안, 교통, 주민 갈등 같은 문제를 조율한다는 점은 같다.
각 도시가 별도의 직책까지 두는 배경에는 야간경제의 커진 영향력이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의 ‘2026 야간경제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야간경제의 규모는 약 3조~4조 달러(약 4000조~5500조원)로 추산된다. 전 세계 취업자 10명 중 1명은 야간경제와 관련된 일에 종사한다. 베를린을 비롯해 디트로이트, 이비자 등은 음악과 클럽 문화를 중심으로 지역 관광경제 전체를 재편한 사례로 꼽힌다.
2018년 베를린의 야간문화 전문가 루츠 라이히젠링과 암스테르담 전 ‘나이트 메이어’ 미릭 밀란이 설립한 바이브랩. 밤의 공간을 도시의 문화 인프라로 보호하기 위해 각국의 야간경제 정책을 연구·자문한다. 사진 바이브랩 홈페이지
물론 야간경제의 성패를 관람객 수나 산업 규모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라이센링 대표는 “방문객 수와 소비액은 밤에 활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 그 밤이 건강하게 작동하는지까지 말해주지는 않는다”며 “5년 뒤에도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창작 생태계가 뒷받침되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도시가 얼마나 늦게까지 불을 밝히느냐보다, 그 시간에 어떤 경험을 만들고 누구와 공존하느냐가 중요해진 것이다.
이에 바이브랩은 다음 달 암스테르담 댄스 이벤트(ADE)와 함께 세계 최초의 야간문화 가치 측정 지표인 ‘나이트 타임 컬처 인덱스’를 발표한다. 건강성과 다양성 등 6개 기준으로 야간문화를 측정하는데, 대륙별로 선정한 암스테르담·뉴욕·시드니·라고스·상파울루·서울이 첫 조사 도시가 됐다.
한국관광학회장을 맡은 서원석 경희대 호텔경영학과 교수는 “야간 문화 프로그램은 관람객의 야간 소비와 체류 시간을 늘린다는 점에서 관광산업에도 상당한 경제적 파급효과를 낸다”며 “지역별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 늘고 있는 만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비슷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지역의 특색을 살린 차별화한 콘텐트를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b.트렌드
트렌드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가치를 반영합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모호함을 밝히는 한줄기 단서가 되기도 하고요. 비크닉이 흘러가는 유행 속에서 의미 있는 트렌드를 건져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