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아모레퍼시픽이 국내 민간기업 중 처음으로 ‘RE100(Renewable Electricity 100)’을 달성했다. 사옥·공장·연구소·지점을 포함해 사업장에서 쓰는 모든 전기를 태양광·풍력 같은 자연에서 얻은 재생 에너지로 바꿨다는 뜻이다. 글로벌 RE100 운영 기관인 ‘더 클라이밋 그룹(The Climate Group)’으로부터 공식 검증도 받았다. 제3자가 RE100 달성을 인정한 것이다. 지난 2021년 국내 뷰티 업계 최초로 RE100에 가입한 아모레퍼시픽은 RE100 달성 시점을 2030년으로 발표했고 5년이나 앞서 조기 목표 달성에 성공했다.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본사 사옥 옥상에 태양광 판넬이 설치돼 있다. 사진 아모레퍼시픽
아모레퍼시픽이 달성한 RE100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그 의미가 더욱 깊다. 재생 에너지를 인증서 형태로 사들이는 방식으로 RE100 100%를 채운 게 아니라서다. 아모레퍼시픽은 자체 태양광 발전이 10%, 특정 발전소와 직접 계약을 맺어 재생 전력을 확보하는 PPA·VPPA 방식으로 11.5%를 채웠다.
국내 기업 중 이 정도 비중까지 직접 조달 방식을 끌어올린 사례는 찾기 어렵다. 재생 전력 100%를 향한 아모레퍼시픽의 지난 여정이 그야말로 ‘개척자’의 기록으로 불리는 이유다.
15년 전, 한 장의 태양광 패널에서 시작한 여정
지난 2011년 경기도 오산에 위치한 아모레퍼시픽 뷰티파크 옥상에 196kW(킬로와트) 규모의 태양광 패널이 처음 설치됐다. 이후 오산은 물론 다른 사업장에도 옥상과 야외 주차장 등 설치가 가능한 공간마다 태양광 패널이 빼곡히 자리했다. 외부에선 잘 보이지 않도록 각도까지 조절해 절묘하게 설치된 태양광 패널은 현재 아모레퍼시픽 전사 기준으로 7763kW에 달한다. 첫 설치 용량의 약 39배다.
경기도 오산에 위치한 아모레퍼시픽 뷰티 파크에 설치된 태양광 패널. 사진 아모레퍼시픽
오산의 태양광 설비 운영을 담당하는 전덕희 아모레퍼시픽 뷰티안전환경 지원팀 차장은 “이곳에 설치된 태양광 설비만 2.6MW(메가와트), 발전량은 3GWh(기가와트아워)로 오산 사업장 전력량의 15%를 대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여름철 피크 기준 사용량이 6000kWh(킬로와트시)까지 치솟는 날에도, 태양광으로 최대 2000kWh를 자체 조달해 외부에서 끌어와야 할 전력을 약 30%까지 낮추기도 한다”고 전했다.
세상에 없던 계약서, 기준을 만들다
아모레퍼시픽이 사업장 곳곳에 설치한 태양광 패널에서 생산하는 에너지는 전체 재생 에너지 조달의 약 10%를 차지한다. 문제는 나머지 90%. 보통은 친환경 인증서를 구매해 이를 채운다. 이른바 REC(신재생에너지 공급인증서)나 한전에 내는 녹색 프리미엄 요금제다.
전기를 한전에서 그대로 받아 사용하면서 ‘이만큼의 재생 전력이 어딘가에서 만들어졌다’는 증서만 따로 사서 100%를 채운다. 일반적인 기업에선 이런 방식으로 RE100을 달성한다. 일종의 ‘프리미엄’을 주고 재생 에너지를 구입해 오는 것이기에 친환경 취지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래픽 마민아 디자이너
하지만 아모레퍼시픽은 인증서만 구매하는 것으로는 재생 에너지 발전소를 새로 늘리는 데 힘을 보태기 어렵다고 봤다. 어렵지만 재생 에너지를 생산하는 발전소와 직접 계약하는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다. 이게 바로 전력구매계약(PPA·Power Purchase Agreement)이다.
아모레퍼시픽 지속가능경영센터에서 초기 PPA를 진행했던 황유나 부장은 발전소를 직접 수소문했다. 컨설팅 업체선 “그냥 REC 인증서를 사라”고 조언했지만 “그래도 도전해보고 싶었다”는 게 황 부장의 설명이다. 이른바 ‘콜드콜(무작위 전화)’까지 해보기도 하고 여러 전문가와의 만남을 이어가면서, 결국 SK이노베이션 E&S의 충남 당진 태양광 발전소와 연결됐다.
지난 2022년 SK E&S 충남 당진 태양광 발전소와 직접 전력구매계약(PPA)을 체결했다. 국내 첫 사례다. 사진 아모레퍼시픽
민간 기업이 발전소와 직접 계약하는 선례가 없었기에 계약 체결까지도 넘어야 할 난관이 많았다. 우선 전력 구매 가격. 20년 단위 계약이라, 킬로와트시(kWh)당 10원 차이도 컸다. 사업장의 산업용 전기 요금보다 웃돈을 주고 구매 계약을 체결했지만, 그사이 산업용 전기 요금이 크게 오르면서 현재는 외려 돈을 번 계약이 됐다. 황 부장은 “2022년 당시 고정가로 계약했기 때문에 지금은 재생 전력을 쓰면서도 일반 전기 대비 비용을 절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주의 바람으로 만든 전기
제주에서 마을 주민들이 함께 운영하는 풍력 발전기와는 국내 최초로 가상전력구매계약(VPPA)을 맺었다. 제주에서 만들어진 풍력 전기가 물리적으로 아모레퍼시픽의 사업장까지 오는 게 아니라, 전기는 제주에서 그대로 소비되고 아모레퍼시픽은 한국에너지공단이 발급하는 인증서를 구매해 사용량을 대체한다.
아모레퍼시픽은 제주 북촌리 마을 주민들이 함께 운영하는 풍력 발전기와 국내 최초로 가상전력구매계약(VPPA)을 맺었다. 사진 아모레퍼시픽
인증서 구매 방식이지만 REC와는 다르다. REC나 녹색 프리미엄 요금제는 그때그때 시장에서 사 오는 방식이라, 매번 다른 발전소의 인증서를 살 수도 있다. 반면 VPPA는 제주의 특정 풍력 발전기와 장기 계약을 직접 맺는다. 전기가 실제로 아모레퍼시픽 사업장까지 배달되는 건 아니지만, 이 발전기가 만든 재생 전력은 우리 책임으로 사겠다고 못 박은 셈이다. 시장 전기 가격이 내려가도, 아모레퍼시픽은 처음 정한 값을 그대로 쳐준다. 인증서만 사는 것과 달리, 특정 발전기 하나가 안정적으로 지속 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는 상생의 계약인 셈이다.
착한 선택, 영리한 전략이 되다
선제적 투자는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됐다. 재생 에너지 계약 당시엔 착한 동기가 바탕이 됐지만, 지금 와선 이런 선택이 한발 빠른 똑똑한 전략이 됐다. 최근 지속가능 경영이 기업 활동의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 잡으며 탄소 배출량 산정과 관리는 글로벌 기업의 경쟁력이 됐다. 제품을 만드는 원료 채취부터 생산·사용·폐기까지 평가하는 전과정평가(LCA)와 제품 탄소발자국(PCF)을 따지는 소비자가 늘어나고 있어서다.
아모레퍼시픽은 2023년 글로벌 RE100을 주관하는 비영리 기구 '더 클라이밋 그룹'으로부터 '시장 개척자(Market Trailblazer) 어워드'를 수상했다. 사진 아모레퍼시픽
탄소발자국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황유나 부장은 “제조 단계에서 쓰는 전력을 재생 전력으로 바꾸면서 제품 하나당 탄소발자국이 7~14%가량 줄어드는 걸 직접 계산해 보고 나서야 알았다”며 “재생 에너지를 쓰는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것만으로도 제품의 탄소발자국이 감소하고 그만큼 저탄소 제품으로서의 경쟁력도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통의 소비재 기업은 탄소발자국을 줄이기 위해 포장재를 종이로 바꾸거나 플라스틱을 줄인다. 생산 공정에서 쓰이는 에너지를 재생 에너지로 바꾸는 작업이 까다롭고 비용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아모레퍼시픽은 RE100으로 제품이 만들어지는 제조 단계부터 탄소 발자국을 줄이는 데 힘을 쏟았다. 까다롭기에 도전하지 않았던 일을 가장 먼저 해결한 셈이다.
시장 개척자가 남긴 사다리, 업계 동료를 돕다
지난 15년간 이어온 도전은 열매를 맺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의 재생 전력 전환율은 2020년 5%에서 2021년 18%, 2022년 34%, 2023년 51%, 2024년 70%를 거쳐 2025년 100%에 닿았다(2025 지속가능성 보고서). 2023년엔 더 클라이밋 그룹으로부터 ‘시장 개척자’ 상도 받았다. 무모하지만 진정성 있는 발걸음은 이제 RE100과 탄소발자국 감축을 고민하는 업계 동료들을 돕는 사다리가 됐다.
그래픽 마민아 디자이너
남은 과제도 있다. 그동안 폐기물 절감, 재생 에너지 전환처럼 제조 사업장에 집중해 온 환경 활동을, 이제는 전과정평가(LCA)로 데이터화해 들여다보는 중이다. 화장품 하나를 놓고 봤을 때 환경 영향도가 플라스틱 포장재, 원료 혹은 소비자 사용 단계 등 어느 지점에서 얼마 만큼 큰지를 정량적으로 짚어내는 작업이다. 그렇게 저탄소 제품을 하나씩 늘려가다 보면, 원료·포장재를 만드는 협력사들까지 재생 에너지로 넘어가는 파급 효과로도 이어질 것으로 본다.
경기도 오산에 위치한 아모레퍼시픽 뷰티 파크 전경. 사진 아모레퍼시픽
우리가 무심히 집어 드는 화장품 하나에도, 15년 전 옥상 패널 한 장에서 시작된 보이지 않는 노력이 새겨져 있다. 아모레퍼시픽의 RE100 달성은 완주 선언이 아니라 출발 선언에 가까울지 모른다. 다음 15년은 또 어떤 무모한 도전을 만들어낼지 지켜볼 일이다.
b.애쓰지
저 회사는 정의로울까? 과거 기업의 평가 기준은 숫자였습니다. 요즘은 환경(Environmental)에 대한 책임, 사회(Social)적 영향, 투명한 지배구조(Governance) 등 이른바 ‘ESG 관점’에서 기업을 판단합니다. 비크닉은 성장과 생존을 위해 ESG에 애쓰는 기업과 브랜드를 조명합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격언은 잠시 잊어주세요. 착한 일은 널리 알리는 게 미덕인 시대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