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를 꺾은 후 코트에 누워 환호하는 한국 테니스 대표팀. 한국은 사상 처음으로 데이비스컵 본선(8강)에 올랐다. 8강전은 11월 이탈리아에서 열린다. [AP=연합뉴스]
“역사를 새로 쓴 사내들.”
국제테니스연맹(ITF)은 20일 한국 남자대표팀(권순우·정현·홍성찬·남지성·박의성)에 이런 별칭을 붙였다. 세계 8강(파이널 8)에 오르며 한국 테니스사를 다시 썼다는 찬사다. 한국은 19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테니스 경기장에서 열린 2026 데이비스컵 최종 본선 진출전 2라운드에서 난적 인도(19위)를 3-1로 꺾었다. 1라운드에서 아르헨티나를 3-2로 잡은 데 이은 2연승이다.
1900년 시작된 데이비스컵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국가대항 구기 대회 중 하나다. 159개국이 예선부터 치열하게 경쟁하고, 주최 측과 언론, 선수들은 모두 이 대회를 ‘테니스 월드컵’이라 부른다. 테니스는 철저한 개인 종목이다. 그래서 국가의 명예를 걸고 뛰는 이 무대의 자부심과 압박감은 남다르다.
로저 페더러, 라파엘 나달, 노바크 조코비치 같은 전설들도 나라의 부름을 받으면 메이저대회만큼 데이비스컵을 소중히 여겼다. 나달은 스페인을 여러 차례 정상으로 이끌며 눈물을 흘렸고, 조코비치도 세르비아 대표로 코트에 섰다. 그랜드슬램 우승과는 또 다른 차원의 애국과 국가대표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테니스는 유럽과 남미, 북미까지 저변이 두터운 글로벌 스포츠다. 한국은 그런 무대에서 테니스 불모지라는 한계를 딛고, 1960년 첫 출전 이후 66년 만에 사상 처음으로 8강에 올랐다. 그동안 최고 성적은 16강으로, 다섯 차례 진출했다. 2022년 파이널스 체제가 도입된 뒤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 거둔 성과이기도 하다.
정현. [로이터=연합뉴스]
원동력은 한국 테니스계가 그토록 바라던 ‘원투 펀치’다. 한국 테니스의 간판으로 불리는 권순우(29·세계 157위)와 정현(30·549위)은 전성기가 한 번도 겹치지 않았다. 정현이 한국 최초로 메이저대회(호주오픈) 4강에 오른 2018년, 대기만성형 권순우는 대학생 유망주였다. 권순우가 급성장한 이듬해부터는 정현이 발바닥, 허리, 발목 부상에 시달리며 내리막을 걸었다. 그러다 2023년에는 권순우마저 슬럼프에 빠졌다. 그해 항저우 아시안게임 단식 2회전에서 세계 636위 카시디트 삼레즈(태국)에게 1-2로 지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라켓을 코트 바닥에 여러 차례 내리쳤다. 조기 탈락으로 병역 혜택을 놓쳤을 뿐 아니라 ‘비매너 선수’라는 비난까지 받은 ‘흑역사’다.
정현이 먼저 일어섰다. 지난해 1월 인도네시아 대회(암만 미네랄)에서 5년 5개월 만에 우승하며 부상을 털어냈고, 3월에는 일본 와세다대 인터내셔널 오픈과 쓰쿠바 대회를 잇달아 제패했다. 올해 5월에는 태국 나콘빠톰 대회 결승에서 삼레즈를 꺾어 권순우의 ‘악연’을 대신 갚아 줬다. 인도와의 첫날 경기에서는 두 번째 단식 주자로 나서 3시간 6분의 혈투 끝에 역전승을 거뒀다. “기술, 체력, 집중력의 삼박자를 모두 회복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권순우. [AP=연합뉴스]
권순우의 부활은 올해다. 국군체육부대에 입대한 그는 약점으로 꼽히던 멘털을 다잡고 부상을 치료하며 훈련에만 매달렸다. 그 결과 지난 4월 광주오픈 챌린저, 5월 중국 우시오픈 챌린저를 연달아 제패했다. 7월 윔블던에서는 본선 2회전까지 올라 한층 성숙한 기량을 보여줬고, 지난달 전역했다. 이번 인도전에서는 단식 두 경기를 모두 이겨 에이스의 몫을 해냈다. 권순우는 “군대에 다녀온 뒤 성숙해졌다. 태극마크를 달고 뛰면 혼자가 아니라 팀원, 팬과 함께 경기하는 느낌이라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다시 힘이 난다”고 했다. 이제 무대는 파이널스다. 8강전은 11월 24일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열린다. 권순우는 “테니스는 모른다. 어느 팀과 붙어도 재미있을 것 같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