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사과 하나를 책상 위에 놓아보자. 우리는 망설이지 않고 사과가 빨갛다고 말한다. 너무 당연해서 의심할 이유조차 없어 보인다. 그런데 방의 불을 모두 끄면 어떨까? 사과는 그대로 있지만 빨강은 사라진다. 사과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빨강만 없어진다. 그렇다면 사과는 정말 빨간 것일까? 사과가 빨갛게 보이는 것은 표면이 모든 빛을 똑같이 반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시광선 가운데 비교적 긴 파장의 빛을 더 많이 반사하고, 그 빛이 눈으로 들어온다. 물리학의 언어로 보면 빛에는 파장과 세기가 있을 뿐이다. 광자(photon)에 ‘빨강’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는 것은 아니다. 빨강은 빛이 눈에 들어온 뒤에야 생긴다. 이쯤 되면 사과보다 내 눈이 더 수상하다. 사람의 망막에는 색을 구별하는 세 종류의 원추세포(cone cell)가 있다. 흔히 빨강·초록·파랑을 보는 세포라고 하지만 정확히는 긴 파장, 중간 파장, 짧은 파장에 상대적으로 더 민감한 세포들이다. 뇌는 어느 한 원추세포가 “빨강이다”라고 외치는 신호를 받는 것이 아니다. 세 종류의 파장이 얼마나 다르게 반응했는지를 비교해 색을 알아낸다.
빨강은 실제로 존재하진 않아
반사된 긴 파장의 가시광선을
망막 속의 원추세포가 색 구별
보이는 것 의심할 때 과학 시작
프랑스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 폴 세잔(1839~1906)의 유화 ‘사과가 있는 정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시 박물관에 있다. [중앙포토]
빛은 다른데 색은 같다 그래서 물리적으로 전혀 다른 빛도 같은 색으로 보일 수 있다. 한 가지 파장의 노란빛(단색광)과, 각각 파장이 다른 빨간빛과 초록빛을 적당히 섞은 빛(혼합광)은 성분이 다르다. 그런데 세 종류 원추세포를 비슷한 비율로 자극하면 두 빛은 우리 눈에 같은 노랑으로 보인다. 이런 경우를 ‘메타머(metamer)’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빛의 재료는 다른데 눈이 내놓은 답은 같은 것이다.
휴대전화와 텔레비전 화면도 이 틈을 이용한다. 화면 속 노란 꽃에 노란색 빛을 내는 화소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빨강과 초록의 작은 빛을 켜면 우리는 노랑을 본다. 보라색도 마찬가지다. 화면은 세상의 모든 빛을 재현할 필요가 없다. 우리 눈의 세 종류 원추세포가 납득할 만한 신호만 보내면 된다. 생각해보면 눈은 꽤 쉽게 속는다. 아니, 속는다는 표현도 정확하지 않다. 애초에 눈은 빛을 복사하도록 만들어진 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물체에서 오는 빛도 늘 같지는 않다. 한낮의 햇빛 아래 놓인 바나나와 저녁 실내등 아래 놓인 바나나가 눈에 보내는 빛은 꽤 다르다. 그래도 우리는 둘 다 노란 바나나라고 인식한다. 뇌가 주변의 밝기와 색을 살펴 조명의 영향을 어느 정도 보정한다. 이것을 색채 항상성이라고 한다. 눈이 카메라라면 이상한 일이지만, 뇌에는 필요한 일이다. 조명이 바뀔 때마다 바나나가 다른 물체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정근영 디자이너
당신의 빨강과 나의 빨강 빨강이 사과에도 없고 빛에도 없다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결국 내가 경험하는 빨강은 눈과 뇌가 빛을 처리하면서 만들어낸 감각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가 남는다. 내가 보는 빨강과 당신이 보는 빨강은 정말 같은가? 우리는 적색 신호등 앞에서 함께 멈춘다. 잘 익은 빨간 딸기도 비슷하게 골라낸다. 하지만 내가 빨강을 볼 때 느끼는 바로 그 느낌이 당신에게도 똑같은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철학에서는 이렇게 개인이 직접 경험하는 감각의 질을 ‘퀄리아(qualia)’라고 부른다. 설탕의 단맛, 장미 향, 아플 때의 통증, 빨강을 보았을 때의 ‘빨강다움’ 같은 것이다. 뇌의 신호는 측정할 수 있어도 그 느낌 자체를 꺼내 옆 사람에게 건넬 수는 없다.
조금 엉뚱한 상상을 해보자. 내가 태어나서 빨강이라고 느껴온 감각이 당신에게는 내가 초록이라고 느끼는 감각과 같다면 어떨까? 그래도 둘은 같은 사과를 가리키며 ‘빨강’이라는 말을 배웠을 것이다. 신호등의 불빛 앞에서 멈췄을 것이고 같은 색연필을 집었을 것이다. 둘의 행동만 봐서는 차이를 알아채기 어렵다. 이른바 ‘뒤바뀐 스펙트럼’이라는 오래된 철학적 상상이다.
당신과 내가 정말 이렇게 뒤바뀐 색의 세계에 사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은 비슷한 원추세포와 시각신경, 비슷한 뇌 구조를 갖고 있다. 색을 얼마나 잘 구별하는지도 실험할 수 있다. 특정 원추세포의 기능이 다르면 색을 구별하는 방식에도 실제 차이가 난다. 여기까지는 재고 비교할 수 있다. 문제는 마지막 한 걸음이다. 당신이 느끼는 빨강을 내 머릿속 빨강과 포개놓을 방법은 없다. 바로 여기서 실험은 멈추고 질문은 남는다. 원추세포의 반응은 잴 수 있고 뇌의 활동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빨강이 내 빨강과 같은지는 아직 모른다. 그렇다고 답답하지는 않다. 오히려 질문이 조금 확대된다. 우리가 눈으로 본다고 믿는 이 세계는 바깥세계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일까, 아니면 뇌가 끊임없이 손질해서 보여주는 것일까? 보는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사과는 그대로다 다시 책상 위의 사과를 본다. 사과에서 반사된 빛이 망막에 닿고 세 종류 원추세포가 반응한다. 신호는 뇌로 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빨강’이 나타난다. 우리는 날마다 이런 엄청난 일을 겪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사과를 집어 든다. 평소에는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경이는 개기일식처럼 해가 사라질 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너무 익숙해서 질문조차 하지 않았던 곳에도 숨어 있다. 사과는 왜 빨간가?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왜 그것을 빨갛게 보는가? 질문 하나를 바꾸었을 뿐인데 사과가 전과 다르게 보인다. 사과는 그대로다. 달라진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내 쪽이다. 빨강 하나를 의심했을 뿐인데 눈앞의 세계가 조금 낯설어졌다. 나는 그런 순간에 과학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