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영의 『구의 증명』, 정유정의 『7년의 밤』 등을 출간했던 은행나무는 소설에 강한 출판사다. 그런 은행나무가 내년 3월부터 시인선 출간을 시작한다. 이미 시인 36명과 출간 계약을 마쳤다. 5~6년 간 시집을 낼 수 있는 라인업이다. 시인 선정을 위해 김상혁·안미옥 시인이 기획위원으로 참여했다. 은행나무는 내년 출간할 1~5권을 어떤 시인 작품으로 할지 결정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백다흠 은행나무 편집장은 “시인선 출간은 꾸준히 염두에 두고 있었고, 2년 전부터 준비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텍스트 힙’ 열풍과 함께 시집 인기가 올라가면서 시인선을 새로 출간하는 출판사가 늘고 있다.
출판사 열림원도 그중 하나다. 열림원은 1980년 문학 출판으로 시작했다. 이해인·류시화 시인 등의 시집을 내기도 했지만, 이청준 전집 등 소설에 더 집중해왔다. 그러다 지난해 1월 ‘시-LIM 시인선’을 시작해 현재까지 시집 네 권을 냈다. 첫 주자가 대표 ‘MZ 시인’으로 꼽히는 고선경 시인의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이었다. 열림원에 따르면, 고 시인의 시집은 현재까지 11쇄를 찍어 누적 발행 부수만 2만2000부에 이른다.
'시-LIM 시인선-001' 고선경 시인의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표지.
열림원 관계자는 “독자들이 기대보다 많이 저희 시인선에 주목해주고 있다”며 “세 번째로 나온 김해솔 시인의 『아몰퍼스』에 대한 관심도 많다”고 말했다.
출판사 자음과모음도 지난달 시인선 ‘자음과모음 시집’ 첫 작품으로 에밀리 정민 윤 시인의 『내가 우리를 짐승이라 말할 때』를 냈다. 문학동네의 임프린트(하위 브랜드) 난다도 지난해 9월 시인선 ‘난다시편’을 시작하고, 첫 시집으로 김혜순 시인의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를 출간했다.
지금까지 시인선은 문학과지성사(문지)와 창작과비평(창비)이 양대 산맥이었다. 둘은 각각 1978년, 1975년부터 시인선을 냈다. 특히 지금까지 641호가 나온 문지의 ‘문학과지성 시인선’은 한국 현대시의 궤적을 담았다는 평가를 받을 뿐 아니라, 크로키로 그린 시인 얼굴과 직사각형 틀 모양의 표지는 젊은 세대에게 시인선의 원형 디자인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문학평론가인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대표는 “동시대 시인들의 시집을 같은 표지 디자인으로 수십 년간 내는 한국 같은 사례는 다른 나라에선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641' 최재원 시인의 『단디 봐라』 표지
연도별 시집 판매량 지수
이런 공고한 전통 속에서도 새로운 도전자들이 최근 나오는 건 일단 시인선이 문학 출판사로서 브랜드 위상을 높이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97년 창립한 자음과모음은 문학 출판사로는 상대적으로 후발 주자였다. 문학 출판사로서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선 시인선 출간이 필요하다고 보고, 숙원 사업으로 삼아 10년 전부터 준비해왔다고 한다.
시집이 ‘팔리는 장르’가 된 지금 시인선 출간이 상업적으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된 측면도 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한국 시집 판매량은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에 비해 2024년은 39.2%, 지난해는 42.0% 상승했다. 올해도 비슷한 수준의 판매량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인기는 20대 여성이 이끌고 있다. 지난해 기준 성·연령별 시집 구매 비중을 분석한 결과 20대 여성이 전체의 22.7%로 가장 많았다.
성·연령별 시집 구매 비중
이들에게 시는 ‘텍스트 힙’을 대표하는 장르다. 민음사에 따르면, GS25가 지난달 출시한 ‘민음사 빵’에 표지가 실린 허연 시인의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는 ‘민음사 빵’ 출시 전 같은 기간과 비교해 3배가량 팔렸다. 이 시집은 민음사 시인선인 ‘민음의 시’ 149호로 나왔었다. 최근 한 식품 기업이 문지에 ‘문학과지성 시인선’ 표지를 활용한 협업을 제안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만큼 시가 젊은 세대를 공략할 마케팅 포인트가 된다는 의미다.
시집의 손익분기점(BEP)이 소설 등 다른 분야보다 낮다는 점도 시인선 출간 도전의 문턱을 낮추는 이유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시집은 상대적으로 편집과 디자인 비용이 낮아 1200부 정도 나가면 BEP를 맞출 수 있는데, 시인선으로 누적이 되면 디자인 비용이 0에 가까워지니 BEP가 1000부 이하로 내려간다”고 말했다. 다른 출판사 관계자는 “문지 시인선의 경우 적자를 본 호가 없는 것으로 안다”며 “문지 시인선을 모으는 독자가 적어도 200~300명이 되고, 그 외에 도서관에도 들어가고, 시 좋아하는 사람들도 사다 보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1000부 판매는 넘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