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이강인(왼쪽)이 ‘마드리드 더비’에서 레알 마드리드 주드 벨링엄과 볼 다툼을 벌이고 있다. 비록 페데리코 발베르데를 향한 거친 태클로 논란을 빚었지만, 이강인은 추가골 기점이 되는 패스를 뿌리며 2-1 승리를 이끌었다. [로이터=연합뉴스]
“명백한 퇴장감이다.”
20일(현지시간) 스페인 마드리드 리야드 에어 메트로폴리타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1-2로 진 레알 마드리드의 조세 모리뉴 감독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채 기자회견장에 A4용지를 치켜들고 나타났다. 전반 44분 이강인(25)이 뒤에서 스터드로 페데리코 발베르데(28·우루과이)의 왼쪽 발목을 밟는 순간을 캡처해 인쇄한 종이였다. 모리뉴는 “여기 오늘 경기의 핵심이 다 들어 있다”고 소리쳤다. 이강인은 경고도, VAR(비디오판독)도 받지 않았으니 더 화가 났을 것이다.
레알 마드리드 조세 모리뉴 감독이 기자회견에 이강인 태클 순간이 인쇄된 A4용지를 들고 나타났다. 사진 이스TV 캡처
경기는 킥오프 전부터 폭발 직전이었다. 전반이 끝나자 터널에서 안토니오 뤼디거(레알)와 모르텐 히울만(아틀레티코)이 언쟁을 벌였고, 양 팀 선수와 코치진이 뒤엉켰다. 모리뉴의 코치 페드로 마차도와 아틀레티코 골키퍼 코치 파블로 베르첼로네가 나란히 퇴장당했다. 레알은 후반 시작을 5분 늦췄고, 후반 4분에는 딘 하위선이 퇴장당해 10명으로 싸웠다.
마드리드 더비는 같은 도시를 쓰는 두 거인의 자존심 싸움이다. 레알이 통산 125승 58무 61패로 앞서지만, 아틀레티코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특히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이 부임한 뒤 팽팽해졌다. 아틀레티코는 레알 안방에서 열린 2013년 코파 델 레이 결승에서 2-1로 이겼고, 이듬해 라리가를 제패했다. 이후 두 팀은 티격태격 앙금은 깊다.
모리뉴와 시메오네의 개인적 라이벌 관계도 치열하다. 2013년 코파 델 레이 결승에서 두 사람이 맞붙었고, 2014년에는 첼시 감독이던 모리뉴가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 아틀레티코에 탈락했다. 이번 경기는 모리뉴가 레알로 복귀해 13년 만에 치른 마드리드 더비였다. 시메오네는 경기 뒤 모리뉴의 분노를 두고 “우리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심판을 존중해야 한다”고 응수했다.
이강인이 발베르데에 태클하는 장면. 사진 ESPN 캡처
이 뜨거운 싸움에 이강인이 불쏘시개가 됐다. 후반 14분 조나단 데이비드의 결승골은 이강인의 스루패스에서 시작됐다. 아틀레티코는 5승 1무 1패(승점 16)로 2위에 올랐고, 레알은 5승 2패(승점 15) 4위로 밀렸다.
아틀레티코 팬에게 이강인은 라이벌을 꺾은 영웅이다. 반면 레알 진영에서 이강인은 ‘발목을 밟고도 판정 덕에 퇴장을 피한 선수’다. 스페인 매체 아스에 따르면 스페인축구협회 심판기술위원회 내부에서도 이강인은 퇴장당했어야 한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레알은 분을 삭이지 않았다. 구단 공식 SNS에 “최악의 심판이 더비 승패를 갈랐다”는 글과 이강인의 태클 장면을 올렸다. 팔로워 1억8000만 명이 넘는 세계 최대 구단이 한 선수를 지목한 셈이다. 곧 이강인의 인스타그램에는 “선수 생명을 끊으려 했다”는 비난과 함께 인종차별 표현이 쏟아졌다. 한국 팬들은 “인종차별을 멈춰라”라는 댓글로 맞섰다.
레알 마드리드 구단도 공식 SNS에 이강인의 태클 장면을 게재하며 “최악의 심판이 더비 승패를 갈랐다”고 썼다. 사진 레알 마드리드 인스타그램
레알은 경기 후 “발베르데가 왼쪽 발목에 심각한 타박상을 입어 추가 검사를 받는다”고 발표했다. 발베르데는 태클 직후 곧장 일어나 주심에게 항의했고 풀타임을 뛰었지만, 현지 언론은 2~3주 결장 가능성을 제기한다.
우루과이 대표팀은 24일 일본, 28일 서울에서 한국과 평가전을 치른다. 발베르데의 출전과 두 사람의 재회가 불투명하다. 이강인은 이제 레알 마드리드라는 거인과 싸우는 아틀레티코의 주역이 됐다. 동료들도 있다. 시메오네 감독의 아들이자 아르헨티나 대표인 줄리아노 시메오네는 오른쪽 측면에서 하위선을 무너뜨려 페널티킥과 퇴장을 이끌어냈다. 이어 이강인의 스루패스를 받아 데이비드의 결승골을 도왔고, 경기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알렉스 바에나도 수퍼스타들이 즐비한 레알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이강인과 발베르데의 악연은 사건에 양념을 더했다. 2017년 한국에서 열린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발베르데는 눈꼬리를 벌리는 인종차별 세리머니로 한국 팬의 공분을 샀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이강인을 태클로 넘어뜨린 뒤 허공에 어퍼컷을 날렸고, 이듬해 라리가에서는 마요르카 소속 이강인에게 거친 백태클을 가해 경고를 받았다. 과거의 앙금이 이번 태클의 변명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앙금이 이번 사건을 더 뜨겁게 만든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28일 서울에서 발베르데와 다시 마주칠 수 있을지, 그때 두 사람이 어떤 표정으로 서울 그라운드에 설지에도 관심이 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