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제7기갑기병연대]'이라크 진공작전 최선봉에 선다'

전설적인 '제7기병대'서 유래

이라크전의 승패를 가늠할 바그다드 대회전을 앞두고 연합군의 진공작전의 선봉에 나선 미 제7기갑기병연대(the 7th Cavalry Regiment)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제7기갑기병연대는 세계 어느 지역에서든 상황이 발생하면 최단시간 내에 바다, 공중, 육지 등을 이용, 작전지역에 배치되는 부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제7기갑기병연대는 현재 텍사스주 포트 후드에 주둔하는 중기갑사단인 제1기병사단 제3, 4여단 예하 부대이며, 제7기갑기병연대 소속 3대대와 4대대는 각각 조지아주 포트 스튜어트의 제3보병사단과 한국의 캠프 개리오웬에 주둔중인 제2보병사단에 배속돼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기갑기병연대는 전차와 헬기 위주로 구성된 독립여단급 부대로, 전차로 구성된 기갑수색대대와 헬기로 구성된 공중기갑수색대대로 구성된다. 제7기갑기병연대의 핵심 임무는 경계와 정찰로 일반적으로 공격시 선두에 서는 것이다.

현재 제1기병사단의 3여단과 4여단 예하부대로 임무 수행중인 제7기갑기병연대는 사단 자체 작전 수행은 물론, 제3보병사단에 배속된 3대대를 통해 바그다드 진공작전을 준비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지상전에서는 기갑부대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찰과 함께 적 전차와 조우시 전투를 하기 위해 앞서 진행하는 기갑부대와 뒤쳐진 보병부대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진군하며, 필요시 공군화력의 지원을 요청한다.

특히 사막지대와 같은 개활지에서는 적 전차 및 주요 방어시설을 격파, 보병의 진군을 돕는 기갑부대의 중요성이 더욱 커진다.

미군은 당초 유럽 주둔 기갑사단으로 하여금 터키를 통해 북쪽에서 바그다드를 향해 남하하는 협공작전을 계획했다. 그러나 터키가 영토를 개방하지 않아 이 계획은 난관에 부딪쳤고 미군은 현재 남쪽으로 부터 바그다드를 공격하려 하고 있다.

바로 이 작전에서 정찰 및 수색 임무를 위해 선두에 나서게 될 제7기갑기병연대의 활약이 더욱 기대되는 것이다.

제7기갑기병연대는 M3A3 브래들리 장갑차, M1A2 에이브럼스 탱크, OH58-D 키오와 워리어 헬기, 107밀리, 120밀리 야포와 토우 미사일 등의 화력으로 무장하고 있다.

제7기갑기병연대는 보병사단 전방에서 정찰활동과 함께 적의 예봉을 꺾는 역할을 수행해왔으며, 미 육군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부대들 중 하나이다.

1866년 의회는 10개의 기병연대를 창설했으며, 그 중 하나가 제7기갑기병연대의 전신인 ‘제7기병대’이다. 이 부대는 멕시코만에서 다코타 지역에 이르는 지역에서 인디언들로 부터 개척자들의 서부행을 호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제7기병대원들은 직업적인 군인들 뿐만 아니라 모험가, 개척가와 신규 이민자, 심지어 죄를 지은 도망자들로도 구성됐다.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이 연대장으로서 이끈 제7기병대는 1870년대 인디언들과의 싸움에서 무수한 승리를 거둬 백인들에게는 명성을, 인디언들에겐 악명을 떨쳤다.

하지만 제7기병대가 하나의 ‘전설’이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전투에서 패했을 때이다.

1876년 6월, 커스터는 ‘시팅 불’과 ‘크레이지 호스’가 이끄는 수우족에게 리틀빅혼 강에서 2백20명의 대원과 함께 포위됐다.

제7기병대는 이 전투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고 커스터도 이곳에서 사망했다.

미국인들의 충격은 처음 무적의 제7기병대가 패배한데다 영웅 커스터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믿지 않았을 정도로 컸다.

충격은 분노로 이어졌고 의회는 수우족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

20세기 들어 제7기병대는 말을 버리고 기계화의 길로 들어섰다.

제7기갑기병연대는 제2차세계대전에도 참가, 1944년 필리핀의마닐라에 처음 입성했으며, 맥아더 장군이 항복을 선언한 일본의 수도 토쿄를 점령하는 역사적 순간에도 그 자리에 있었다.

한국전에도 참전했던 제7기갑기병연대의 2대대는 1950년 7월26일, 피난민 사이에 북한군이 숨어있을 지 모른다는 이유로 철도교 아래의 비무장 피난민들에게 기관총을 난사, 수백명을 사망케 했다. 이 사건이 바로 ‘노근리 학살’이다.

제7기갑기병연대는 이후에도 베트남전에도 참전,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전과를 올렸다. 멜 깁슨이 주연한 영화 ‘위 워 솔저스(We were Soldiers)’는 베트남전을 무대로 이 제7기갑기병연대 병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미국은 제7기갑기병연대 1대대 3백95명의 병사들을 베트남과의 전면전에 앞서 ‘죽음의 협곡’이라 불리는 아이드랑 계곡에 파견, 시험전투를 펼쳤다. 5배나 그 수가 많은 월맹군 정예요원들에 의해 선발대는 희생을 당하고 말았다.

제7기갑기병연대의 명성은 빛나는 전과보다는 이렇듯 어떤 전장에서든 선봉에 서서 적과 맞서 싸우는 용맹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임상환 기자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