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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를 바꾼 30대 사건] 존 웨슬리의 회심

‘가슴의 신앙’ 강조 감리교 토대 마련

마틴 루터가 1517년 독일의 비텐베르그 성당정문에 면죄부의 남용을 경고하는 ‘95개조’를 써붙임으로써 시작된 종교개혁은 언제까지 계속되었을까? 어떤 역사가는 1555년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사이에 체결된 평화협정을 종교개혁의 끝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역사가는 기독교 신앙을 ‘절대의존의 감정’으로 규정한 18세기 말의 신학자 쉴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가 종교개혁을 마무리했다고 보기도 한다.

 로마서 3장 23-25절 말씀처럼 교회의 전통이나 개인의 선행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의 결단이 종교개혁의 정신이었다면, 1738년 5월 24일 영국 런던의 알덜스게이트(Aldersgate)에서 ‘마음이 뜨거워진’ 경험을 했던 존 웨슬리의 회심사건은 종교개혁이 기독교역사에서 일단락되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뜨거운 ‘가슴의 신앙(Religion of Heart)’이 신앙고백화(Confessionalization)됨으로써, 종교개혁이 일시적인 저항운동이 아닌 기독교 신앙고백의 한 형태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어머니 수잔나를 통하여 엄격한 가정교육과 신앙훈련을 받은 존 웨슬리는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1720년 영국의 명문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하였다. 젊은 존 웨슬리에게 심각한 영적인 도전을 준 것은 토마스 아켐피스의 15세기 기독교 고전인 <그리스도를 본받아> 였다. 이 책을 통하여 존 웨슬리는 간결한 의도와 순수한 사랑을 가진 ‘내적 종교’와 ‘마음의 종교’를 기독교 신앙의 이상으로 사모하게 되었다.

 젊은 웨슬리에게 영국 성공회는 형식과 제도만 남아있는 이름뿐인 교회로 보였다. 형식주의에 빠져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는 영국 교회를 깨우고자하는 열망을 안고, 존 웨슬리는 1725년 성공회의 사제로 안수를 받고, 1727년 부친 사무엘 웨슬리가 섬기고 있던 교회에 목사로 부임한다. 이 시기에 탐독한 윌리엄 로(William Law)의 <기독교인의 완전> 과 <신실하고 성화된 삶을 향한 진지한 부르심> 을 통하여 젊은 웨슬리의 신학은 계속해서 발전되어갔다.

 2년 후 다시 옥스포드로 돌아온 존 웨슬리는 동생 찰스와 함께 초기 ‘메소디스트(Methodists)’ 라고 불리는 집단적 경건주의 운동을 시작한다. 1729년부터 1735년까지의 이 시기를 ‘옥스포드 메소디즘(Oxford Methodism)’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외형상 독일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밴드(Band)’ 모임처럼 보였던 이 초기 메소디스트들은 철저한 경건생활과 더불어 옥스포드의 감옥과 빈민가를 순회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자선활동을 펼쳤다.

 옥스포드 지식인의 안락한 생활을 뒤로 하고 존 웨슬리가 선택한 신앙의 여정은 이제 막 식민지 개척활동이 시작된 미국의 남부 조지아주의 선교사 생활이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웨슬리의 미국 선교사 생활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젊은 여성과의 스캔들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르고,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미국 원주민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다. 실망을 안고 영국으로 돌아오던 웨슬리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인디언들을 개종시킨답시고 미국으로 건너 갔다. 오, 그렇다면 나 자신은 누가 개종시킬수 있단 말인가? 과연 누가 어떻게 이 불신앙의 추한 마음으로부터 나를 구해 줄 것인가?”

 영국으로 돌아온 웨슬리는 모라비안 경건주의자들과의 교제를 통해 큰 영향을 받는다. 모라비안들과 영적 생활을 계속하던 웨슬리를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역사적인 사건이 1738년 5월 24일 알덜스게이트의 기도모임에서 일어났다.

 이때 일어난 유명한 ‘알덜스게이트 회심사건’에 대해 존 웨슬리는 자신의 일기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그 날 저녁, 나는 알덜스게이트에서 열린 모임에 망설이면서 참석하였는데 그 곳에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강해> 의 서문을 읽고 있었다. 저녁 9시 15분전 쯤 되었을 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마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변화시키시는 능력에 대해서 설명하다가 이상하게 내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며, 나 같은 죄인에게도 구원의 확신을 주시고, 죄와 사망의 율법에서 나를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이 알덜스게이트에서의 회심을 통하여, ‘마음이 뜨거워 지는’것을 강조하는 웨슬리의 신학과 감리교회의 정신이 태동된 것이다. 웨슬리의 회심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전통적인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위에 신실한 믿음과 더불어 성화된 삶의 열매를 강조하는 웨슬리 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옥스포드 메소디스트의 일원이었던 조오지 휫필드가 1739년부터 시작한 야외설교를 메소디스트 운동의 선교 방법으로 받아들이면서, 점점 감리교회만의 독특한 신학과 신앙집단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1739년부터 ‘연합회’라는 이름의 감리교회 모임이 런던에서 처음으로 공식화되었고, 1742년부터는 속회(Class Meeting)가 조직되었다. 이들 초기 감리교회 모임의 규범이 된 <연합회의 본질과 일반 규범> 에서는 선행을 장려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여러가지 계기들(Means of Grace)의 실천을 강조하여 정기적인 기도와 성경묵상, 성만찬의 참여, 규칙적인 독서 등을 제도화하였다. 이러한 조직체계의 정비는 1744년에 최초로 결성된 감리교 연회(Methodist Conference)를 통하여 결실을 맺게 되었다.

 감리교회의 설립자 존 웨슬리는 25만마일 이상을 여행하면서 4만번 이상의 설교와 2백권이 넘는 저술을 통하여 잠들어 있던 영국의 영혼을 깨우고자 하였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1791년, “가장 좋았던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라는 최후의 말을 남기면서 끝이 났다. 그의 숭고한 삶은 마음의 종교를 믿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화된 삶을 향한 끊임 없는 자기 갱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종교개혁자들의 모토였던 ‘믿음을 통한 구원’의 정신이 다시 한번 형식주의로 흘러갈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신앙체험을 통하여 새로운 신앙고백의 시대를 열었던 위대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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