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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38] 비행학교/비행대 창설 (11)미군 조종사 출신들도 속속 합류

비행학교/비행대가 문을 열고 비상을 준비하는 동안, 한 해 전 미국 육해군 비행학교나 민간 비행학교에 들어갔던 한인청년들도 속속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이곳으로 합류하기 시작했다. 비행학교를 졸업하는 이들 애국청년을 바라보며 느꼈던 한국인들의 감동과 기대는 당시 신문에 잘 담겨 있다.

"캘리포니아 레드우드시티에 있는 비행학교에서 수학하는 오림하, 이용선 양씨는 천만의 곤란을 불구하고 독립전쟁에 없을 수 없는 비행술이란 분투심으로 힘써 연구한 결과로 금월 25일에 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며 씨 등은 장차 윌로우스로 향하겠더라. (참고) 온 세상이 다 말하는바 이다음 전쟁은 공중전쟁이라 하니 이는 곧 비행의 필요를 말함이라. 지금 한국은 독립전쟁에 있으니 비행술의 가치가 얼마나 한 것을 더구나 말할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이 제1회 비행가들은 기위 졸업하였거니와 그 학교에서 공부하는 이들이 계속하여 졸업할 터이며 또는 다른 곳에서 연구하는 이들도 계속하여 졸업을 하려니와 많은 비행가들이 나기를 축사하노라."(신한민보, 1920년 5월 28일)

"이 붓을 잡은 나는 이에 상쾌한 감상을 가져 해외 해내에 계신 우리 형제자매에게 새 소식을 전하노라. 우리가 오랜 세월을 두고 한다 한다 하더니 오늘에 이르러는 볼만한 일 들을만한 소식이 종종 생기는도다. 우리가 전하려는 이 소식은 우리 민족에 처음인 소식이요 우리 역사에 없는 사적이니…(중략)…필라델피아에서는 노정민, 리버사이드에서는 박낙선, 레드우드시티에서는 오림하, 이용선, 이초, 디트로이트 (비행기수선과)에서는 우병옥 제군이 비상한 업을 마치고 교문을 나선 것이라. 이상의 여섯 청년은 우리중의 희귀한 인물이라 사랑할 만 하도다. 이것을 배우기 위해 교문에 들어가던 그네들은 그 생명과 성공을 비교하였도다. 다시 말하면 공중연습을 시험하다가 떨어지면 죽자 하는 생각 곧 생명을 내어놓고 시작하였다 함이라. 그 용감한 결심! 그 건장한 의지! 깊이 찬성하겠도다. 나는 들었노라! 비행술 졸업장을 주는 최후 기능은 비행기로 공중에서 '여덟 팔 자'(∞)를 쓴다 하더라…(하략)…."(신한민보, 1920년 6월 15일)

"레드우드시티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천신만고의 침로를 익혀가면서 공부하던 한장호, 이용근, 장병훈 3씨는 금월 17일에 비행술을 졸업하였는데 그 3씨의 인내력과 결심을 누가 아니 흠모하리 만은 그들의 애국심은 가히 배울만하도다. 생각건대 그들은 우리의 독립운동이 일어난 후에 원수 왜국을 소멸하는 데는 비행술이 아니면 능치 못하리라 하는 굳은 결심을 가졌도다. 우리 일반이 희망하는 것도 이에서 지나지 아니하도다. 3씨의 목적하고 결심한 바를 성공할진저."(신한민보, 1920년 6월 22일)

당시 미국항공협회의 조종사 자격시험은 3회 비행으로 이뤄졌다. 첫 1, 2회 비행에서는 매번 공중에서 '∞' 모양을 5번 만든 다음 지상에 정해둔 표지로부터 150피트 내에서 착륙에 성공해야 했으며, 마지막인 3회째 비행에서는 385피트 고도에서 엔진을 끄고 활강비행으로 착륙에 성공해야 했다.(위클리 뉴스, 1989년 11월 29일)

비행학교/비행대는 창설 후 약 4개월만인 1920년 7월 5일 축하비행까지 곁들인 공식 개교식을 갖고 조직도 정비하면서 비상을 위해 박차를 가했다.

공식개교식에는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비행학교의 대부 격인 김종림, 비행학교 감독 곽림대, 조종사 오림하 등 재미동포 200여명과 수석비행교관 프랭크 브라이언트 등이 참여한 가운데 공식 개교식을 거행했다.

"7월 5일 윌로우스에서 한인 비행가양성소 개소식을 거행하였는데, 부근 각처에 있는 일반 동포가 재류국의 경절을 타서 모두 업을 정지하고 예식에 참여한 이가 2백여 인인데, 열정을 다하여 우리 역사상 처음 되는 일을 위하여 축하하고 예식을 마친 후에 일반이 들에 나아가 2척의 비행기를 구경하고, 뿌라연트 교수와 오림하 씨가 비행을 시험하여 일반 관광자에게 깊은 흥미를 주었더라."(신한민보, 1920년 7월 15일)

기사에 등장하는 뿌라연트 교수는 물론 프랭크 브라이언트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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