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상 목사 전기] 신앙의 자유 찾아 목숨 건 남한행
이원상 목사는 1937년 압록강 건너편 만주 땅, 길림성 통화 북편의 산성진 이라는 마을에서 신앙심이 깊은 이성봉 장로와 윤봉선 성도의 아들로 태어났다.부친 이성봉 장로는 20대에 한국에서 미국인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신자가 됐다. 그는 이후 만주로 가서 청년기를 보냈으며 해방후 북한을 거쳐 서울로 오게됐다.
부친의 영향으로 이원상 목사는 어려서부터 만주의 산성진 장로 교회(김석찬 목사)에서 말씀을 듣기 시작했다.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유치원과 주일학교 등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내는 동안 늘 말씀과 함께 살 수 있었다.
이목사가족이 만주에 살던 시절,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항복하고 조국 대한민국은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집권, 기독교를 박해하며 종교의 자유를 박탈하기 시작했다. 이에 부친 이성봉 장로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한 땅으로 이주했다.
이곳이 압록강 남쪽 평안북도 만포진(현 자강도)이다. 이들은 이후 압록강변에 있는 만포진 장로 교회(이무성 목사)에 다니며 1947년까지 2년간 그곳에서 살다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다시금 남한으로의 탈출을 결심, 1947년에 서울로 이주했다.
이처럼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남으로 이주를 거듭한 이원상 목사의 가족은 한마디로 축복받은 목회자의 가문이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이원상 목사는 이성봉 장로(산성진 교회에서 장립) 와 평신도인 윤봉선 성도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세 명의 형님과 누님 한 분이 계셨는데 맏형인 이원조와 셋째 형인 이영복은 모두 교회 장로로 봉사하다 소천했다.
가족중 조카 이승혁(뉴욕), 이인국(산호세) 등이 현직 목사다. 아들 이요셉은 버지니아텍 (Virginia Tech University)을 졸업한 후, 동문인 이 에스더와 결혼해 현재 메릴랜드 게이더스버그에 있는 미국인 교회인 Covenant Life Church에서 청장년 담당 목회자로 사역 중이다. 외동딸 이 유니스는 스탠포드 대학(Stanford University)을 졸업했다. 유니스는 같은 학교 출신으로 현재 뉴욕대 의과대학에 재학중인 주흥원과 결혼해 뉴욕에 거주하고 있다.
이목사는 황해도 출신으로 6.25 전쟁을 피해 경산에 와서 함께 경산교회를 다니던 김영자(미국명 이영자)와 결혼했다. 고 김산봉 집사와 강옥화 권사의 5남매 중 오빠 다음으로 장녀인 김영자는 대구 신명여고와 효성여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경산에서 약국을 경영했었다.
이목사는 장모인 강옥화 권사와 김영자 사모를 단순히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와 사위·장모의 관계를 넘어 평생 기도의 동역자로 매우 귀하게 여긴다. 그만큼 이들은 평생 동역자로 함께 기도하며 같은 길을 걸어 왔다.
곁에서 오래도록 이들을 지켜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같이 증언한다. 이목사의 큰 처남은 일찍이 미국으로 유학와 현재 미국 산타 클라라(Santa Clara) 대학의 경영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성봉 장로의 가족이 만주에서 북한을 거쳐 남한으로 탈출을 결행하게 된 배경에는 일화가 있다. 부친 이성봉 장로의 중국인 친구가 “이성봉은 기독교 사상이 투철하여 위험하니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중국 공산당 회의 내용을 알려준 것이다.
부친 이성봉은 이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일단 홀로 만포진으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돌아와 가족을 동반하고 북한으로 탈출했다. 이 목사는 8.15 해방 이후 지방 유지들이 밤사이 소문 없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기독교 신앙이 아니었으면 평생 공산주의자로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목사는 부친의 기독교 신앙과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깊이 감사한다. 그러나 이 목사의 가족이 만주에서 북한으로 나왔다가 다시 38선을 넘어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남한 땅으로 정착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 목사의 가족이 38선을 넘어올때 동반했던 안내인이 당초 약속을 어기고 달아난 상태에서 가족이 소련군에게 발각되어 38선 경계의 보안서에 감금되는 일이 생겼다.
그러나 다행히 소련군은 본적이 남한인 사람은 남으로 보내준다는 특혜를 적용, 이들 가족을 풀어주었고 이목사 가족들은 무사히 서울로 들어오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었다고 이목사는 회상한다.
당시 이목사의 부친인 이성봉 장로는 해주에서 남한으로의 탈출을 준비하며 달빛이 없는 그믐밤을 기다리는 동안 무사 탈출을 위해 매일 해주 뒷산에 올라가 산 기도를 드렸었다. 이때마다 부친은 소년 이원상을 동반했었다. 어린 소년 이원상이 부친과 함께 드렸던 산 기도의 경험은 목사 이원상의 기도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정정호집사(와싱톤중앙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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