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키우듯 배추농사 지어요”
김씨 농장 운영 김호선씨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김치가 ‘금치’가 될만큼 귀했던 배추. 하지만 이젠 본국보다 싱싱하면서도 저렴하게 팔릴 정도로 배추는 한인마켓의 인기좋은 세일 품목이 됐다.
본국에서 수입하는 것도 아니고 캘리포니아 등 서부에서 우송해 오는 것도 아닌데 한인마켓에서 우리가 흔히 보는 배추는 어디에서 재배되는 걸까.
한인사회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워싱턴 일원의 한인 가정의 식탁에 오르는 배추는 메릴랜드 동부에서 대량으로 재배되고 있었다.
워싱턴 한인사회에서 가장 가까운 배추농장은 메릴랜드 피츠빌에 위치한 김씨 농장(대표 김호선). 피츠빌은 버지니아 애난데일이나 메릴랜드 락빌에서 자동차로 세 시간 정도 떨어진 농촌지역. 50번 도로를 달려 애나폴리스와 베이 브릿지를 건넌 뒤 404 도로와 13번 도로를 따라 남동쪽으로 가면 만나는 곳이다.
행정 구역상 메릴랜드에 속하지만 델라웨어와 인접한 지역이어서 델라웨어 서부지역을 관통해야 한다. 피츠빌 인근에 가면 델라웨어와 메릴랜드 번호판을 단 자동차들이 사이좋게 도로를 달리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한국으로 치자면 경상도와 전라도 접경인 ‘화계장터’와 같다고나 할까.
“메릴랜드 시골에서 배추 농사 짓는 것 뿐인데 무슨 기사거리가 된다고 여기까지 왔어요.” 피츠빌에서도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한 김호선씨의 농장에 들어서자 김씨가 마음 좋은 농부의 함박 얼굴을 하며 반갑게 맞이했다.
김호선씨의 집은 미국판 전원일기에서나 볼 수 있는 널찍한 마당을 갖고 있는 싱글홈. 오른쪽에는 농산물과 이를 담을 수 있는 종이박스들이 쌓여있는 대형 창고가 위치해 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김씨의 집은 저택이지만 집 안에 배어있는 냄새는 강원도 시골 집에서 맡을 수 있는 정겨운 우리 농촌 집과 같다는 것.
“1985년에 닭 공장에 취업이민 왔어요. 영주권 딴 뒤 잠시 다른 일을 하다가 1989년께부터 농사를 지었어요. 처음에는 고생도 많이 했지요. 하지만 땅은 거짓말 안합디다. 땀 흘린 만큼 수확하는 재미로 지금까지 하고 있지요.”
대농이자 부농인 김호선씨는 부인 김정자씨, 세 자녀와 함께 닭 공장으로 유명한 메릴랜드 솔즈베리 인근으로 이민왔다. 1년 2개월 정도 닭 공장에서 일한 뒤 김씨는 몇년 동안 공구상으로 일했다. 하지만 미래 비전이 없다고 판단, 1989년께 피츠빌에 6.7에이커 농지를 산 뒤 농사일에 뛰어들었다.
“이민 오기 전 서울 우이동에서 살았지만 고향은 경기도 파주예요. 어렸을 때 농사일을 거들었던 경험이 있어 농사를 해보기로 마음 먹었죠. 하지만 의욕만 앞섰지 생각만큼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몽땅 망했습니다.”
김씨가 첫해 손을 댔던 작물은 한국산 가지. 한국산 종자로 키운 가지는 검은 빛이 도는 짙은 보라색이다. 하지만 분홍빛의 중국산 가지에 익숙한 중국계와 백인 등 소비자들이 낯선 한국산 가지를 외면했다. 한인들은 구분하기 어렵지만 한국산 가지가 중
국산에 비해 조금 더 질기다는 것도 폐착이 됐다.
“첫해 손해를 본 뒤 두번째 해에는 작물을 바꿔 오이 농사를 했어요. 이후 열무, 고추, 호박 , 무 등으로 재배 작물도 다양하게 넓혀갔죠.”
김호선씨가 올해 경작하고 있는 농지의 크기는 대략 4백에이커 정도. 2백에이커의 밭에는 배추를 심었고 나머지 농토에는 열무·고추·총각무·오이·호박 등 각종 야채를 재배하고 있다.
이모작을 하는 배추는 4월 초순과 8월 중순에 씨를 뿌린 뒤 각각 6월초와 11월초에 수확한다. 땅이 넓다보니 기계로 종자를 뿌리는 데만 보름 정도 걸린다. 지난주부터 본격 수확을 하고 있는 올해 두 번째 배추 농사를 위해 김씨 농장에는 현재 22명의 인부들이 일하고 있다. 이들은 몇년째 김씨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히스패닉 인부들. 외아들 만근씨와 다른 한인 1명이 함께 인부를 관리하며 김씨를 돕고 있다.
“영어도 능통하지 않고 스페인어도 못하지만 히스패닉 친구들하고는 손발이 척척 맞습니다. 농사 일 앞에는 말이 문제가 되지 않아요.” 히스패닉 인부들에게 박스를 옮기라고 영어와 함께 제스처를 취한 김씨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한다. 요즘 김씨의 밭에서 수확되는 배추의 양은 컨테이너 4대 분량. 한 컨테이너에 들어가는 배추는 대략 7백70박스. 한 박스에 보통 배추 10단이 들어간다고 보면 김씨 농장에서는 하루에 3만8백단 정도의 배추가 수확되고 있다.
김씨 농장의 배추는 한아름·롯데·그랜드마트 등 워싱턴 일원의 한인 마켓은 물론, 뉴욕·뉴저지, 시카고, 조지아 등으로 운송된다.
“한인사회가 커지면서 한인마켓으로 나가는 배추의 양도 크게 늘었어요. 하지만 아직도 배추시장에서는 중국마켓이 더 큽니다. 자식같은 배추가 출하되는 것을 보며 시원섭섭한 감정이 들기는 처음 농사지을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예요.”
김씨 농장에서 재배하는 같은 품종의 배추라도 출하하는 곳이 중국마켓이냐, 한인마켓이냐에 따라 수확하는 방법이 다르다. 푸르스름한 배추 잎을 좋아하는 한인들을 위해서는 배추통의 파란색 바깥 잎을 통째로 수확하는 반면, 흰색 배추를 선호하는 중국
계에게는 바깥 잎은 모두 떼버리고 배추통의 안쪽 흰색부분만 떼어낸다.
“날씨가 따뜻하면 내년 1월까지 넘어갈 수 있지만 보통 크리스마스 전까지 배추 수확을 마치게 됩니다. 제가 재배한 배추로 담근 김치가 이민생활의 활력소가 됐으면 좋겠네요.”
석양을 맞으며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기자에게 김씨는 배추국보다 더 구수한 인정을 담아 작별인사를 했다. 농부 김호선씨가 배추 키우는 피츠빌은 전원일기의 무대인 양촌리처럼 거름냄새가 아련했다.
피츠빌=박성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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