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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련의 단상>재 첩 국

아주 어릴 적 첫새벽에 들려오던 아련한 소리. “재첩국 사이소, 재첩국 사이소.”
가까이서 들리다 멀어져 가는 그 소리에 잠이 깬 우리는 따뜻한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좀더 자고 싶은 생각에 아랫목을 깊이 파고들어 가곤 했다.
그러다 일어난 아침상에는 뽀얀 국물에 아기 손톱만한 조개들이 국그릇 바닥에 모여있는 재첩국이 밥상에 오르곤 했다. 맑고 시원한 국물 위에는 부추 잎이 떠있었다.
우리 식구들은 이 맑은 조개 국을 참 좋아들 했다. 어둑어둑한 새벽 희미하게 밝아오는 시간에 들려오던 청아한 소리 “재첩국 사이소, 재첩국 사이소.”
그 소리는 우리의 아침잠을 깨우는 첫닭 울음소리 같았다. 어쩌다 날씨가 흐리고 비가 내려 그 정다운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허전하기까지 했다. 그런 다음날 첫새벽에 또다시 그 청아한 소리가 들리면 무언가 안심이 되는 마음을 느끼곤 했다. 시원하고 담백한 재첩국은 어머니께서 참으로 좋아하셨던 음식이다. 맑고 깨끗한 섬진강 물에서 자란 재첩이 으뜸이라며 할머니께서도 이 국을 깨나 좋아하셨다. 아침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국물이 시원하다는 말을 계속하시는 할머니께 “할머니 재첩국이 그렇게 시원해요?”라고 내가 물으면 “하모 하모 그렇고 말고, 아가! 어서 묵어야 제, 훌훌 더러 마시거라, 사람은 배가 든든해야 하루가 실한 기라.” 하시며 할머니 국을 내 국그릇에 더 담아 주시곤 했다.
재첩은 난류와 한류가 교차되면서 염분이 적은 곳에서 서식하는데 섬진강 재첩은 해남 재첩이나 낙동강 재첩보다 맛이 좋고 깨끗하다고 한다. 섬진강은 아주 옛날 하동 장패들이 다닐 때는 나루에서 강물로 밥을 해 먹었을 정도로 맑고 깨끗한 강물이었다고 한다. 이 맑고 깨끗한 섬진강 물에 바닷물이 뒤섞이면서 적당한 염도를 띠게 되고 그래서 이 곳에서 자란 재첩은 색깔도 좋고 향도 깊다고 한다.
재첩은 강어귀의 강바닥을 훑어서 건져 올린 조개다. 깊은 강이 아래쪽으로 흐르고 흘러 마침내 흐름을 다하여 바다와 만나는 어귀에는 갈매기들이 끼룩거리며 날고, 넓고 넓은 모래톱이 형성되는 이 곳에서 재첩은 자란다. 하구에서 건져 올린 이 작은 조개는 강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지점, 묘한 땅에서 자라는 것이다.
허리까지 오는 고무로 된 옷을 입고 강바닥을 호미로 긁는 동네 아낙들. 물 속에 서서 호미로 강바닥을 긁어 진흙에 섞여있는 재첩을 잡은 후 낚시용 뜰채만한 채로 진흙을 씻어 재첩을 골라낸다. 차가운 물에 몸담기를 예닐곱 시간, 털구멍을 죄어들듯 한기가 스미고 그제서야 굽혔던 허리를 곧추세운다. 이내 새어나오는 큰 숨은 강바람에 실려 날아가고 한평생 당신의 힘으로만 살아온 아낙들은 그리도 험한 생을 건져 올리듯 재첩을 건진다. “돈 나오니라 찔뚱짤뚱, 조개 나오니라 찔쑥짤쑥, 아저씨! 이 좀보소 새 삐린다. 그새 조개가 어디 가 삐린나? 좀 남가 놓고 가소, 뭐이라고 그리 싹 가져가 삐요. 얼마나 훑었는지 한 마리도 없네.” 앞서 지나간 사람들이 죄다 훑어가 조개가 없다는 한 아낙의 투정이다. 물 빠지면 드러나는 왕 등에 핀 물결 무늬 같은 주름을 얼굴에 담은 아낙들의 마음은 섬진강 하구만큼이나 넓다. 알 수 없는 누군가는 재첩 잡는 풍경을 이렇게 묘사하기도 했다.
흐름을 다한 강이 새로운 세상, 바다를 만나 합쳐지면서 얼마나 많은 아픔과 곤고함에 빠졌을까? 그 틈에서 자란 재첩은 세상을 달관한 도인 같은 맑은 맛을 제 몸에서 풀어내 담백하고 시원하다.
늙은 어부의 아낙 같은 얼굴로 옹기종기 국그릇 바닥에 모여있던 재첩은 아침상 앞의 우리 식구에게 정겨움과 아늑함을 주었다. 이제는 한국의 아침에서도 이 청아한 소리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새벽 시험공부에 흐려진 눈으로 하품을 거듭하는 나에게 들려오곤 하던 소리. “재첩국 사이소, 재첩국 사이소.” 그 소리가 메아리처럼 멀어질 때쯤 어머니는 그 뽀얀 국물을 갖다 주시며 따끈한 국물 좀 마시고 하라며 내 등을 쓸어주시곤 하셨다. 그때 재첩국 그릇에서는 갯내가 촘촘히 담겨있다 엷은 비린내를 풍기곤 했다. 아주 어릴 적 그 언젠가부터 들리곤 하던 소리. “재첩국 사이소, 재첩국 사이소.” 아득하고 향기롭던 그 소리는 지금 생각하니 어머니의 냄새 같고, 할머니의 냄새 같고, 고향의 냄새 같다. 그리고 한평생 물속에서 ‘조개 나오니라, 돈 나오니라’ 험한 세상, 거친 인생 강바닥 훑는 섬진강 아낙의 애간장 끓는 삶의 냄새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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