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셔 플레이스] '테크노 유토피아'의 허실
박용필/논설고문
할 수 없이 타임 워너의 고객서비스센터에 문의를 했다. 전화를 받은 것은 '기계' 안내원. 집 전화번호와 집코드, 문제가 무엇인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놀란 것은 질문에 말로 답을 해야된다는 사실.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는지 '기계'는 '못 알아 먹었다'며 다시 말을 하라고 다그치기도 했다. 요즘은 고객 서비스도 애플의 아이폰에 내장된 '시리'처럼 인공지능 음성인식으로 처리하는 모양이다.
'기계' 안내원은 해당지역의 전화가 폭주하고 있으니 나중에 리턴콜을 해주겠다고 했다. 정상으로 되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다섯시간 여. 금단현상은 담배나 술, 마약 등 습관성 물질을 끊었을 때 생기는 생리학적 증상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디지털 기기로부터 격리됐을 때 그 고통도 만만치 않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다.
인터넷이 불통이니 세상 돌아가는 걸 알 수 있나, TV가 나오지 않으니 경기를 볼 수 있나, 갑자기 조바심이 생기고 불안감이 엄습해 '디지털 금단현상'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산골 오지를 여행 중이라도 와이파이(wi-fi)가 설치된 곳에만 들어가면 인터넷이 빵빵 터져 세상과 단절되지 않는 이 시대. 심지어 '사회주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칼 마르크스조차 그 옛날 과학 기술이 독재 왕정을 종식시키고 종교를 해체해 인간을 자유롭게 할 거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마치 과학이 교회를 대신해 인류를 구원해 줄 수 있다는 헛된 꿈을 갖게 해줬다고 할까.
편한 세상에 태어난 것도 복이려니 했지만 엊그제 불통의 사태를 겪고 나니 공연히 심사가 뒤틀린다. 뭐, 곧 '테크노 유토피아(techno utopia)'가 온다고? 기술의 발전이 인류에 풍요를 가져다 준다는 게 도시 허구처럼 들린다. 불과 20년 전 아날로그 시절에도 잘만 살았는데, 괜히 디지털이니 뭐니 하며 신기술이 나와 참 헷갈리는 세상이 됐다.
테크노 유토피아의 산실은 실리콘 밸리다. 그래서 흔히 '캘리포니언 이데올로기(Californian Ideology)'라고도 불린다. 앞으로는 좌·우의 진영논리가 판을 치는 정치 대신 기술이 '이념'으로 굳어진다는 것이다. 애플이 단기간에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우뚝 서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테크노 유토피아의 열풍과 무관치 않다. 물론 스티브 잡스라는 혁신의 아이콘이 등장한 것도 큰 몫을 했지만.
언젠가 세계적인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구글의 인공지능 전문가)은 이런 말을 했다. "2045년 이후엔 죽음이 매우 드문 시대가 올 겁니다." 그 때쯤이면 세포 크기만 해진 컴퓨터 칩이 사람 몸 속에 이식돼 건강관리까지 맡게 된다. 기계가 인간이 되고, 인간이 기계가 되는 시대. 인간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섬뜩한 예측이다.
참, 리턴콜을 해주겠다던 타임 워너는 이후 감감 무소식이다. '스마트' 안내원이 이민자라고 얕잡아 봤는지, 아니면 아직 그런 기능이 없는지 알 길은 없지만. 유토피아(이상향)에 대한 기대 보다는 테크노 포비아(공포)가 앞서는데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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