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부끄러움을 배웁니다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시대다. 은유의 상실 시대다. 수줍은 듯 빗대어 말하는 것보다 돌직구가 환영받는 세상이다. 클릭하는 순간 지구 저 밑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현 시대에 '부끄러움'이란 단어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공짜 상품을 타기 위해 앞사람들을 밀치며 달려가는 뉴스 속 코미디 같은 장면을 보라. 높은 사람의 말 한마디로 하루 아침에 입장을 바꾸는 지도자들을 보라. 내일이면 탄로날 일을 거짓으로 고하는 뻔뻔한 혀들을 보아라.범죄들이 다양해졌다. 아니 단순해졌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아버지가 딸을 성추행하고 또 얼마 전에는 기분 나쁘게 쳐다본다는 이유 하나로 동네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이 한국에서 일어났다. 무엇을 상실했길래 우리는 이처럼 단세포적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일까? 컴퓨터의 자판처럼 스마트폰의 평면 화면처럼 한 번의 클릭으로 서로를 죽이고 무너뜨리는 게임같은 것이 삶이 아니지 않은가?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진 것이 분명하다.
박완서의 '부끄러움을 가르쳐 드립니다'는 두 번의 이혼 후 세 번째 결혼을 한 중년 여성의 고백적 소설이다. 주인공은 두 번의 결혼에 실패하고 세 번째 남자와 결혼하면서 지방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서울로 돌아온다. 어린 시절 유난히 부끄러움이 많았던 소녀였지만 전쟁과 피난 어머니로 인해 가난한 기지촌 생활을 지나오면서 어느새 세 번째 결혼했다는 사실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여자가 되었다.
그녀에게 피난 시절 눈발 속에 웅장하게 서 있던 남대문의 영상을 향수로 간직한 서울은 근대화 과정 속에 물질주의에 매몰된 속물적 공간이 되어 있었다. 부끄러움을 상실한 채 환멸만이 가득찬 세속의 공간 안에서 세 명의 남편 그리고 그녀의 동창들이 펼쳐내는 인생극은 하나 같이 진실이 결여되고 세속적이며 가식투성이다. 주인공은 위선적 삶에 멀미를 느끼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현실에 젖어들어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은 종로 한복판에서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일본 관광 안내원의 말을 들으며 밀려오는 부끄러움의 감성을 경험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에게 부끄러움이 남아있는 사실에 안도한다. 그리고는 어렵사리 되찾은 부끄러움의 감정이 결코 자신만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박완서의 '부끄러움을 가르쳐드립니다'는 문학의 힘을 빌려 물질적 가치가 삶의 지표가 되어 버린 현실을 고발한 작품이다.
물질문명이 빼앗아 간 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부끄러움'이다. 현대인들은 '부끄러움'을 능력 없음이나 자신 없음으로 폄하하지만 공자는 말했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기"라고. 탈무드는 말했다. "부끄러움은 양심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얼굴 두꺼운 사람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 얼굴을 붉힐 줄 안다는 점이 아니었던가? 부끄러움은 도덕의 척도다. 심장 저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언어다. 녹슨 부끄러움을 꺼내본다. 부끄러움을 배운다.
김 은 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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