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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 성인들] 복녀 요안나 유간

8월29일

성 그레고리오 교황

성 그레고리오 교황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의 브티트 크로와에서 1792년 10월 25일 태어난 요안나 유간은 어린 나이에 바다로 고기잡이를 떠난 아버지가 실종된 후 다른 세 명의 형제들과 함께 일찍 가난과 고된 노동을 알게 됐다.

집 근처에 위치한 저택의 부엌일을 돕는 하녀로 시작하여 생-세르방의 로제 병원에서 간호사로 가정부로 때로는 간병인으로 일을 했다.

1839년 겨울 어느 날 갑자기 혼자가 된 수족을 못 쓰는 반신불수의 장님 할머니를 집에 모셔와 보살핀 것이 계기가 되어 1843년 그녀를 중심으로 세 명의 젊은 동반자와 합세하여 40여명의 노인들을 보살피게 됐다.

그리고 이 세 젊은이들은 수도회의 기틀이 잡혀가는 이 작은 모임의 원장으로 요안나 유간을 추대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그녀는 부당하게 원장 자리에서 밀러났지만 오로지 침묵과 온순함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써 이 모든 일들을 받아들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차차 그녀는 잊혀졌고 그녀가 세상을 떠날 무렵 그녀가 수도회의 창립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수녀는 거의 없었다.

1879년 8월29일 그녀가 사망한 후 1902년에 이르러 그 동안 잊혀졌던 요안나 유간 십자가의 마리아 수녀가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의 창립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1982년 10월 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시복됐다.

성 그레고리오 교황
9월3일


부유한 귀족 고르디아누스의 아들로 태어난 성 대 그레고리오 1세는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고, 랑고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략이 로마를 위협하고 있을 당시에는 로마의 장관이었다. 수도생활을 오랫동안 꿈꾸어 왔기 때문에 그는 574년쯤에 로마와 시칠리아에 수도원을 세우고 35세쯤에 수도자가 되었다. 579년부터 585년까지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교황 대사로 활약하다가, 5년 후에 자기 수도원으로 돌아온 뒤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수도자가 교황으로 선출된 것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교회법령을 정비하고 무능한 성직자들을 해임시켰으며, 막대한 경비를 들여 자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지혜롭게 교황청 재산을 관리했고, 랑고바르드족으로부터 포로들을 석방시켰으며, 부당한 박해를 받던 유대인들을 보호하고, 기근의 희생자들을 구호하였다. 593년 그는 랑고바르드족 침략군을 설득하여 로마를 평정시켰으므로 랑고바르드족의 왕과 함께 평화의 수호자로 존경을 받았다. 그는 위대한 주교이자 정치인이었다.

또한 그의 학덕은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레굴라 파스토랄리스’, ‘모랄리아’, ‘대화집’을 비롯하여 800여 통의 서한들 속에 담긴 그의 사상은 서방교회의 공식 예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유럽의 역사에도 큰 발자국을 남겼다. 그는 영국의 개종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고, 교황권이 교회의 최고 권위임을 재확립하였으며, 교황을 일컫는 칭호인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란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위대한 설교가였고, 로마 전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결과, 그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편집자로 추앙받는다. 또한 베네딕토 수도회를 면속시켜 교황의 권위 하에 두었다. 그는 라틴 교부의 일원으로 공경을 받으며 중세 교황직의 아버지로 추앙받는다. 서거 즉시 시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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