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족보의 사회학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동서양을 막론하고 나의 뿌리를 찾아 그 정체성을 알고 싶어하는 것은 가족의 가치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하다. 동양적인 선입견과는 달리 뿌리 찾기는 미국인을 비롯한 서양 사람들에게도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조상의 가계도가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된 나라이다. 무려 600여 년 전까지 꼼꼼하게 기록된 가계도가 있다고 한다.
반면에 미국은 가계도를 갖춘 집안이 거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조상 중 일부는 영국이나 유럽 각지에서 문제를 일으켜 건너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어 고려 때 우리나라에 전해진 족보는 한 가문의 계통과 혈연관계를 부계를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나타낸 책으로 보첩이라고도 하며 동일 혈족의 원류를 밝히고 그 혈통을 존중하며 집안 내림의 계승을 명예로 삼는 한 집안의 역사책이다. 가계도에 불과한 족보는 연척관계를 확인하는 수단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족보는 조선 왕조 계급사회의 산물로서 조선 중기 이후 당쟁이 성하면서 양반의 혈통과 동족 관계를 기록한 족보가 앞다투어 만들어져 양반의 신분 및 족당 관계를 밝혀주는 자료가 되었다.
고려 초기 일반인이 성을 갖기 시작하기 이전에는 백성(百姓)이라는 말이 온갖 성씨를 뜻하는, 성을 가진 귀족들을 이르는 말이었다니 성이 없었던 천민들에게는 족보는커녕 조상의 내력조차 알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전 국민이 성을 가지게 된 것은 갑오경장(1894) 이후부터다. 그 이전에는 성을 가진 국민이 인구의 30%에 불과했다. 신분제가 폐지되고 1909년 민적법이 시행됨에 따라 천민들도 성을 가지게 되는데, 양반에게 부여받거나 흔한 성씨를 나름대로 붙여 가문 있는 집안의 본관을 임의로 사용하는 등의 사례가 빈번하였다.
그런데 왜 한국인들은 족보에 집착했을까?
조선 후기는 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전락하여 군역과 부역을 지는 등 사회적인 차별이 심하였다. 뼈대 있는 가문의 족보 자체로 지배층의 특권을 보증해주는 문서로서 기능했기 때문에 양반이 되려고 몰락한 양반의 족보를 사기도 하고, 뇌물을 써 가면서 족보에 끼려고 하는 등 위·변조가 성행하였다.
‘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을 쓴 한국학의 대가 에드워드 와그너(작고·하버드대 교수) 논문 ‘1663년 한성부 북부지역 호적을 통해 본 조선사회의 구조’를 보면 그가 지금의 서울 마포, 서대문구 일대 681가구 총인구 2374명의 신분 분석을 한 결과 양반은 220명(9.27%)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 상놈은 334명으로 14.7%이다. 나머지 76.7%는 천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철종(1858)에 이르러 양반 70%, 상민 28%, 노비 2% 비율로 뒤바뀐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신분상승을 꾀한 결과이다.
‘수저 계급론’이 한국 청년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어렵사리 대학을 나와도 신분상승은 커녕 먹고 살기도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금수저, 은수저가 부와 권력의 대물림인 조선 시대 명문가의 족보 이상의 위력이 있으니 ‘헬조선’에 조선이 붙은 이유를 알 듯도 하다. 수저 계급론은 불가능한 신분상승에 대한 절망감과 특권층이 지배하는, 사회정의가 훼손되고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한탄의 목소리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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