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오디세이]모델·가수 최연제(선우용녀 딸)…청춘스타, 한의사로 인생 2막을 열다
14세 때 LA로 가족이민
대학 때 유명 모델로 활동
91년 한국서 가수데뷔 인기
MC·DJ·뮤지컬로 종횡무진
불임전문 한의사로 유명
결혼 10년 만에 아들 출산
"하루하루가 감사하고 행복"
호기심 많은 고양이 눈빛을 한 이 여자. 90년대 청춘을 보낸 이들이라면 잊을 수 없는 가수 최연제(본명 김연재·46)다. 1993년 영화 OST '너의 마음을 내게 준다면'으로 혜성처럼 등장해 시원하면서도 깊이 있는 목소리로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그녀는 어느 날 소리소문 없이 우리 곁을 떠난 듯 했다.
그랬던 그녀가 지난 해 모친인 탤런트 선우용녀를 다룬 한 휴먼다큐로 근황을 전했다.
TV 속 그녀는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며 리처드 기어를 쏙 빼닮은 남편과 알콩달콩 살고 있었다. 지금의 길 위에 서기까지 어떤 여정을 걸어왔는지, 스타의 평범한 일상은 어떤지 궁금증을 가득 안고 그녀의 패서디나 자택을 방문했다. 십 수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이국적인 아름다움과 여전히 톡톡 튀는 에너지로 그녀와 함께한 한나절은 꽤나 유쾌하고 즐거웠다.
#모범생에서 패션모델로
중학교 1학년 때인 1983년 LA로 가족 이민 온 그녀의 학창시절은 평범한 듯 화려했다. 1남1녀 중 장녀인 그녀는 공부도 열심이었지만 베벌리힐스 고교시절 유일한 동양인 치어리더 주장으로 활동할 만큼 끼가 넘쳤다.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고교졸업 후 파슨스 디자인스쿨에 합격했지만 자유분방한 학교 분위기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엄한 부친의 반대로 입학을 포기하고 부모의 바람대로 의대 진학을 목표로 샌타모니카 칼리지에서 생물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그녀의 타고난 끼와 재능은 감출 수 없었다. 당시 동양인 여성으로는 보기 드문 175cm라는 큰 키와 이국적인 외모, 매력적인 카리스마를 한눈에 알아본 모델 친구가 그녀에게 모델 일을 제안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 타라 뱅크스 등 톱 모델들이 소속돼 있던 모델 에이전시인 'LA모델'과 계약을 맺고 1989년부터 2년간 모델 활동을 했다. 동양인 모델이 많지 않던 당시 그녀는 세인트존, 샤넬, 코카콜라, 메이시백화점 등 유명 브랜드의 유일한 동양인 모델로 지면과 TV 광고를 비롯해 패션쇼까지 접수하며 유명 모델로 자리 잡았다.
"당시 학생으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만큼 돈도 많이 벌었죠. 충분히 만족하며 공부할 수 있었는데 당시 한국으로 돌아간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LA생활을 접고 무작정 한국행을 택했죠."
#대한민국이 사랑한 청춘스타
모친은 그녀의 한국 연예계 생활을 극구 말렸지만 어디 자식 이기는 부모 있던가. 1991년 1집 앨범의 쓰라린 고배 끝 1993년 '너의 마음을 내게 준다면'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그녀는 'LA에서 온 미녀스타'로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당시 그녀는 각종 가요차트와 가요프로그램 1위 행진을 이어가며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특히 탁월한 영어 실력으로 당시 내한한 할리우드 스타들의 통역을 도맡아 연예정보 프로그램 리포터로 인기를 얻었고 예능 MC, 라디오 DJ, 뮤지컬 배우로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당시 잠도 못자고 하루 20개가 넘는 스케줄을 소화하며 강행군을 했죠. 물론 교포라고 왕따도 당하고 엄마 후광 업은 낙하산이라며 백안시 하는 이들 틈바구니에서 연예계 생활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어요. 주변 지인들이 가끔 그 화려했던 시절이 그립지 않느냐고 하는데 어휴, 그때 원 없이 활동해서 인지 그런 생각은 전혀 안 들어요.(웃음)"
이처럼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녀가 어느 날 우리 곁에서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게 된 것은 결혼소식과 함께였다. 한인 2세와 결혼해 시애틀에서 신혼살림을 차린 그녀는 연예계 활동은 접은 듯 보였다. 그러나 2년 뒤 우여곡절 끝 이혼에 이르렀고 그녀는 못다 한 학업을 위해 시애틀 명문 아트스쿨인 코니시 예술대학에서 '클래식&20세기음악작곡'을 전공해 2001년 우등졸업의 영예를 안았다. 졸업 후 2002년 LA로 온 그녀는 라디오코리아에서 '최연제의 세이예스'라는 음악방송을 1년간 진행하기도 했다.
#환자와 공감하는 한의사
그녀는 2012년 패서디나에 빔 웰니스(BEAM Wellness)한의원을 개업, 현재 꽤 유명한 한의사로 자리 잡았다.
가수이며 음악 전공자인 그녀가 한의학에 빠지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에 배우게 된 수지침 덕분. 취미삼아 배운 수지침으로 지인들 병을 고쳐주며 한의에 매력을 느낀 그녀는 2006년 샌타모니카 소재 요산 한의대학교 대학원에 입학, 만학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5년 재혼해 결혼 10년 만인 지난 3월 아들 유빈(미국명 이든)이를 출산했다. 2003년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한 그녀의 재혼스토리는 한 편의 영화 같다.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LA행 비행기 안에서 쪽지를 전달하며 시작된 남편의 짝사랑은 그 후 끈질긴 구애와 독학으로 배워 곱게 접은 종이학 101마리를 타고 그녀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했다. 남편 케빈 고든(46)씨는 현재 웰스파고 서부지역 본사 수석부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남편의 도움이 없었다면 박사학위까지 6년간의 긴 공부를 마칠 수 없었을 거예요. 밤늦게까지 공부만 하는 제게 늘 남편은 불평 한마디 없이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니까요."
여성전문의인 그녀의 전문 진료과목은 불임. 아마 이는 그녀가 결혼 후 쭉 아기를 갖고 싶어 했으나 임신이 힘들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지 싶었다.
"맞아요. 임신을 미루다 40세에 막상 아이를 가지려하니 힘들었죠. 거기다 자궁내막증으로 수술을 했고 2년 뒤 결국 인공수정을 시도했는데 이 역시도 쉽지 않았어요. 4번의 인공수정과 2번의 유산 끝 7년 만에 아이를 얻었으니까요. 그러면서 불임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남일 같지 않아 제 몸을 실험대상 삼아 불임전문 한의사가 됐죠."
현재 그녀는 LA 유명 불임클리닉 전문의가 그녀에게 환자를 보낼 만큼 주류사회에서 불임전문 한의사로 인정받고 있다.
"불임 환자들을 위한 제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저도 기적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었죠. 물론 임신과 출산과정도 너무 힘들었고 출산 후에도 고생했지만 아이가 주는 행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아이를 보면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디 쉬운 삶이 있겠는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며 그저 바로 지금 이 시간을 의미 있고 행복하게 보내려 노력할 밖에. 화려한 스타로서의 삶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엄마로, 한의사로 분주한 일상만이 남았지만 그녀는 젊은 날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눈부셨다.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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