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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이야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다이아몬드<2>

김남표 / 킴스보석 대표

4. 빛의 산(Mountain of Light) 코이누르(Koh-I-Noor)

코이누르는 페르시아어로 '빛의 산'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피의 다이아몬드'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이 보석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권력자가 다퉜기 때문이다.

코이누르는 본래 인도의 카카디야 왕조 것이었다. 그 후 인도를 지배하는 세력이 계속 바뀜에 따라 이 다이아몬드 역시 인도의 투클루크 왕조와 델리 왕조, 무굴 제국을 거쳐 페르시아 아프샤르 왕조로 넘어갔다 그 후에도 여러 왕국의 소유를 거친 코이누르는 마지막엔 인도를 침략한 영국의 손에 떨어진다. 당시 인도를 지배한 시크왕국의 마지막 왕 둘레프싱이 영국을 따른다는 뜻으로 빅토리아 여왕에게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를 바친 것. 그러나 인도인들은 당시 둘레프싱의 나이가 13세로 어렸기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석을 바친 것이 아닌 빼앗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를 왕관에 박아 자신뿐만 아니라 대대로 그 왕관을 쓰게 했다. 1937년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 조지 6세의 즉위식에서 그의 부인이자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어머니가 그 왕관을 썼고, 1955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자리에 오를 때 썼다.

최근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왕관 한 가운데 장식돼 위엄을 한껏 고양시켜준 코이누르 다이아몬드가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1억 파운드(약 1억2245만 달러)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 보석은 과연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코이누르를 소유한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사실이다. 역사를 보면 그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가진 자가 이 보석을 소유해왔기 때문이다.

첫번째 카카디야 왕조의 소유였다가 14세기 초 2번째 투클루크 왕조가 카카디야 왕조를 정복한 뒤 이 다이아몬드를 전리품으로 획득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델리 왕조를 거쳐 무굴 제국의 시조 바부르(Babur, 1484~1530)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1530년 바부르가 죽자 페르시아의 새로운 권력 나디르 샤(Nadir Shah)는 이 다이아몬드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는 페르시아의 모하메드 왕의 후궁으로부터 그의 터번 속에 이 다이아몬드를 감추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나디르는 이 다이아몬드를 찾기 위해 한가지 계략으로 기념파티를 베풀기로 했다. 기념파티 중 나디르는 동양의 오랜 관습의 하나인 형제애와 영원한 우정을 상징하기 위해 터번을 바꿀 것을 제안했다. 모하메드는 이런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교활한 나디르는 터번은 말할 것도 없고 모하메드 왕의 목도 쉽게 벨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입신 출세자였고, 그의 아들을 모하메드 왕의 딸과 결혼시킴으로써 자신의 가문을 천한 혈통으로부터 격상시키려 마음 먹고 있었기 때문에 사돈 될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예의에 벗어나는 것이라 생각해 계략을 궁리하던 끝에 서로 존경하는 표시로 터번을 교환하는 고대 관습을 생각해 낸 것이다.

바꾼 터번을 가지고 돌아온 나디르는 터번을 끌러보기 시작했다. 바꾼 터번 속에는 그가 그처럼 갖고 싶어하던 다이아몬드가 들어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그가 내뱉은 말이 '코이누르(Koh-I-Noor)'였다. 그것은 '빛의 산'이라는 뜻이었다. 이것이 이 다이아몬드가 '코이누르'라는 역사적인 이름을 갖게 된 배경이다.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는 영국 수정궁의 전시회에서 일반인들에게 공개됐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사연을 갖고 있는 보석이었다.

당시 '더 타임스' 기사는 오랜 시간을 기다리며 고생 끝에 전시실에서 이 보석을 본 순간 만족하는 이가 별로 없었다고 보도했다. 불완전한 커트로 영국 왕실 역시 크게 실망했다.

그래서 코이누르를 새롭게 커팅하기로 결정했으며, 이는 경험이 많은 암스테르담의 보석세공사 부루상저와 헤터에게 맡겨졌고, 그들이 영국으로 와서 세공 커팅 작업을 했다. 이 커트를 '스텔라 브릴리언트 커트'라 부른다. 이로 인해 코이누르는 186캐럿에서 108.9캐럿으로 줄어들었다.

이후 코이누르는 영국 왕실의 보석세공사인 가라드에 의해 2000개의 작은 다이아몬드와 함께 빅토리아 여왕의 왕관에 장식됐고 1911년에는 메리 왕비의 왕관에, 1937년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모후관에 장식됐다가 여왕의 왕관에 장식된다.

20세기에 이르러 코이누르의 소유권에 대한 문제가 인도와 파키스탄에 의해 제기됐다. 영국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가 최근에 이르면서 반환 불가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2010년 인도를 방문한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코이누르가 전례가 되면 대영박물관은 순식간에 비어버릴 것"이라고 말해 상황을 정리했으나 그런 논리가 과연 설득력이 있는지 모르겠다.

최근 인도의 시민단체가 제기한 반환 소송, 인도 고급 관리들의 영국 의회 방문 로비 등 이 보석에 얽힌 피묻은 역사가 다른 방식으로 재현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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