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은 참 좋은 달이다.
인디언 썸머도 지나고 하늘은 높고 맑으며 오색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다.
오곡백과를 거둬들여 축하하는 추석이 있으며 부모님을 그리며 생각하는 노인의 날도 있다.
밴쿠버에서 노인의 날인 10월 2일에 특별한 행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나 이즈음 추석과 더불어 많은 경노행사가 있었다.
캐나다는 노인 천국이라고 한다.
초 고령사회가 도래하는 이 시대에 가장 문제가 되는 건강문제, 경제적 어려움이 해결되는 곳이다.
최고의 시설에서 천사와 같은 간호사가 돌보아주며 효자보다 더 정확한 연금(pension)을 받을 수 있다.
양상순 목사의 칼럼에서 언급된 (구구팔팔 이삼사)처럼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틀만 아프고 삼일째 죽자!"란 건배 사는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과연 광역 밴쿠버에서 90세 이상 한인노인 분이 몇 분이나 계실까? 각 교회, 성당, 서광사, 노인회, 실버스쿨, 시온성가단, 프레이저벨리까지 설문지와 전화통화로 조사한 바로는 약 30 여명인 것을 알았다.
그 중에서 가장 연장자이며 두 분이 건강하고 해로한 분으로 후손이 번성한 96세 이자형 내외분을 찾아 뵈었다.
1936년 두 분이 26세, 18세 되는 아름다운 날에 신의주 삼일교회에서 혼례식을 올렸다.
이 교회는 신부김신일씨의 아버지 김덕엽 장로가 터를 기증하고 손수 벽돌을 나르며 건축한 교회고 이어서 유치원과 삼일학원도 설립하였다.
신랑은 중국을 좁다고 다녔던 풍운아요, 신부는 소문난대로 미녀 중에 미녀였다.
신랑은 천성이 부지런하고 시간 생활이 철저하며 또한 효자로 5 남매 중 막내였지만 항상 어머님을 모셨다.
걱정 없던 신혼도 잠깐. 큰딸이 4살, 큰 아들이 돌을 넘길 무렵 이북에는 공산사상이 휩쓸게 되었다.
가진 자들을 숙청하는 바람에 시어머님과 4식구는 칠흑 같은 야밤을 틈타 목숨을 걸고 38 선을 넘었다.
그때 어머님을 놓쳐버려 세 번이나 38선을 오가며 헤맨 끝에 드디어 해주에서 다시 만날 수가 있었다.
이때가 일생에서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고 한다.
간신히 여러 가지 장사 끝에 광산업에서 목돈을 쥐고 서울 갈월동에 정착하며 숨을 돌릴 수 있을 때 6.25 가 일어났다.
월남한 남편이 해를 당할까 봐 먼저 피난을 보낸 후에 젊은 새댁은 남하 하려고 했으나 이미 한강철교는 끊기고 남편을 따라가는 길은 막막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공습과 대포가 터지는 속에서도 시어머님과 아이들을 위하여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녀야만 했다.
환도후 남편이 돌아 올 때까지가 제2의 고난기 였다고 한다.
남편을 만난 것도 잠깐. 또 다시 일사(1월4일) 후퇴로 이번에는 제주도까지 온 식구가 함께 가게 된다.
이곳에서 시어머님이 풍으로 쓰러지며 수족을 못쓰게 되었다.
제주도 생활 7년 만에 불편하신 어머님과 아들 셋, 딸 둘 모두 8식구가 경기가 좋다던 부산으로 이주 후 실향민이 겪는 수 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두 부부는 금은방도 운영하고 시내 번화가에 있는 동양극장도 인수할 수 있었다.
큰 아들이 대학을 막 입학하려는 즈음 아들의 견문을 넓혀주기 위하여 드넓은 세계로 보내기로 작정하고 그 당시 가장 쉽게 나갈 수 있었던 브라질로 보냈다.
종국에는 미국으로 가도록 권했으나 브라질에서 머물게 되었고 큰 아들이 떠난 1년 후 부산생활 15년을 청산하고 온 가족이 브라질에서 다시 모이게 된다.
풍으로 누우셨던 시어머님은 이미 부산에서 돌아가신 후였다.
브라질을 거점으로 둘째 아들은 브라질에 남고 큰아들은 밴쿠버로 이주하면서 브라질보다 물 좋고 산 좋은 노인들의 천국인 밴쿠버로 부모님을 초청하였다.
따로 써리에 집을 장만해 드리고 본인은 사업상 에드몬튼에 주로 거주한다.
셋째 아들은 미국 뉴저지에, 딸 둘은 워싱턴 D.C.에 정착했다.
부부가 효자,효부라 복을 받아 자손들이 잘 되어 손자 손녀가 14명, 증손자녀가 10명이다.
지금도 써리집 텃밭에는 들깨가 지천인데 잎을 따지 않고 영근 들깨를 추수하여 드신다.
일찍 기침하여 자전거를 타고 집 주변을 돌고 난 후 수영을 하고 두 분이 늘 손잡고 걸으며 살림을 직접 하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고 양주가 해로하고 자녀 모두가 대과 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 번성하고 있음은 젊은 시절부터 한결같이 하나님을 믿어온 믿음생활이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인생은 ‘흐르는 강물처럼’ 부딪히며 뒹굴며 달려서 빠르게 간다.
벌써 다음해는 결혼 70주년이라고 했다.
미국에서든 밴쿠버에서든 한바탕 큰 잔치가 벌어질 것이다.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두 분은 말 끝을 맺는다.
◆스완 김의 ‘뷰티풀 패밀리’
이민지라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가정의 소중함을 간직하고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을 가꾸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고단한 이민 생활을 가족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본지는 스완 김씨의 취재기‘뷰티퓰 패밀리’를 실어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훌륭한 가정을 이룬 한인들을 소개합니다.
스완 김씨는 “가정들이 어떻게 고난과 역경을 넘겼는지를 소개함으로써 인생의 최종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한다”며 “또한 이를 통해 한민족의 긍지도 높이고 사회를 정화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스완 김씨는 한국에서 교사생활을 한 바 있으며 밴쿠버에서도 스완 패밀리 차일드 케어를 설립하는 등 후진 교육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