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시간의 마디 있어 더욱 귀한 인생
2017년을 시작하며 올 한 해도 열심히 살겠다는 다짐과 함께 걸어놓은 달력을 하나 둘 넘기다 보니 어느덧 마지막 한 장만 덩그러니 남겨 놓았다. 이마저도 넘기면 그렇지 않아도 빠른 시간인데 그 시간의 향내마저 송두리째 사그라들까봐 아쉬운 눈길로 한참을 바라본다. 그 안에는 한 해 동안 열심히 달려온 이들의 땀내가 서려 있다. 하나둘 내 곁을 떠난 이들의 얼굴이 담겨 있다. 남은 한 장의 달력마저 넘기고 나면 나이 한 살 더 먹는다는 서운함도 걸려 있다. 망연히 흐르는 시간이라는 강에 발 한번 담갔다 빼면 끝나는 인생이기에 마음을 단단히 잡아두지 않으면 속절없는 시간에 치여 일생을 허무하게 마치기 쉽다.한 해를 마무리하는 때가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나마 시간의 매듭이라도 지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한 해를 돌아보면 아쉬웠던 기억이 많이 떠오른다. 홀로 견디기 힘들어 속울음을 삼켜야 했고, 뜻대로 안 되는 답답함의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기도 했다. 온종일 서서 일하느라 발은 퉁퉁 부르트고, 손목이며 무릎이며 뼈마디마다 성한 곳 하나 없이 끙끙 앓으면서도 삶의 자리를 지켜내야 했다. 자식들 때문에 미국에 왔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식은 돌볼 겨를이 없어 속상함에 마음의 굳은살도 박였다. 낯선 나라, 낯선 문화, 모국어가 아닌 말에 치여 사느라 눈치만 늘었다. 2017년, 365일이라는 세월은 그렇게 우리 삶에 굵은 마디 하나 새겨 놓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세월에 인생을 맡긴 채 마디 하나 더 생겼다고 원망하기보다 내가 스스로 마디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스스로 새기는 마디는 마디라기보다 매듭이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내 힘으로 세월을 묶어 능동적으로 매듭을 짓기 때문이다. 한 해 돌아보니 어려웠지만 그래도 이만큼 살아낸 것이 고맙다고 느낀다면 감사의 매듭을 지어야 한다. 오늘보다 내일에 대한 기대가 조금이라도 더 있다면 소망이라는 매듭으로 세월을 묶어야 한다.
'죽귀유절(竹貴有節)' '대나무는 마디 있음을 귀히 여긴다'는 뜻이다. 가늘고 속이 빈 대나무가 하늘 높이 솟는 까닭은 중간중간에 마디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 한 해도 마음의 굳은살, 눈물과 아픔으로 지낸 세월이 만든 마디가 나를 자라게 했다. 감사, 은혜, 소망이라는 매듭으로 세월을 낚아채 묶은 마디가 또 그만큼 나를 자라게 했다. 우리는 올 한 해 동안 눈물과 아픔, 기쁨과 웃음으로 새겨진 마디만큼 자랐고, 또 그 마디를 딛고 다시 그다음 마디만큼 자랄 것이다.
마디 있음을 귀히 여겨야 하는 것은 대나무만이 아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삶에 새겨진 마디가 있음을 귀히 여기는 사람은 세월에 휩쓸리는 인생을 살지 않는다. 인내로 새겨진 마디, 고난으로 만들어진 마디를 통해, 아니면 감사와 은혜, 소망으로 매듭지어진 마디를 만들며 세월이라는 파도를 넘는 인생을 산다.
연말은 세월이라는 마디가 우리를 자라게 했음을 기억하며 한 해를 돌아볼 때다. 올 한 해 인생에 새겨진 마디가 우리를 자라게 했듯이 새해에도 우리 인생에 놓인 세월에 마디를 새길 각오를 다질 때다. 그리고 그 마디와 마디 사이에는 마디를 딛고 자란 우리들의 이야기가 새겨질 것이다.
이창민 / LA연합감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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