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본 시카고, 시카고 사람들] IMF로 헐값에 철강 계약 후 설렁탕 집서 마시던 쓴 소주
나일스 의류 쇼에서 만났던 옛 고객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1990년대 중반, YS 치세의 그 유명한 '세계화' 바람이 불어 본사 임직원들이 말 그대로 '떼를 지어' 선진기업 시찰을 나왔다.
그 중 하나가 모토롤라였다. 포스코가 제2이동통신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 데다, 모토롤라가 시작한 식스 시그마 경영이 유행을 타고 있었다. 임원들의 샴버그 모토롤라 캠퍼스 방문을 주선하고, 안내 겸 통역으로 동행했다. 연구시설에서 'Connected World'를 체험하고 캠퍼스 교육시설을 둘러보면서 "이것이 세계 기업이구나" 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식스 시그마와 Connected World는 여전한데, 모토롤라는 애플•삼성•엘지에 밀려 중국에 팔렸고, 새로운 세상처럼 보였던 샴버그 캠퍼스도 복합주택단지로 개발된다니 격세지감이다.
시카고는 미국 철강산업 중심지 중 하나이다. 인랜드 스틸(Inland Steel)의 멋진 본사 건물이 먼로 스트리트에 있었고, 내셔널 스틸(National Steel) 본사는 인근 인디애나 주 사우스벤드에 있었다. US스틸(US Steel) 게리 제철소는 미국 최대 규모다. 특히 인랜드 스틸의 인디애나 하버 제철소는 미국 내에서 최고 효율을 자랑해 포스코 기술진이 기술 교류차 자주 방문했었다.
미국 최고의 제철소들이었지만, 세계 최신의 제철소에서 온 우리 눈에는 낡은 설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품질 면에서는 우리와 대등하거나 우위에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IMF 사태가 터졌다. 제철산업 특성상 국내 수요 급감에도 용광로는 계속 쇳물을 생산해야 했고, 해외 지사에 "(중간소재) 슬라브 주문이라도 받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제안서를 돌렸더니 인랜드와 US 스틸 등이 관심을 보여 기술협의를 위해 포스코 기술진과 함께 시카고를 방문했다. 우리의 약점을 알고 있는 상대방들은 최고급 강을 보통 강 이하의 가격으로 후려쳤고, 줄다리기 끝에 US스틸 게리 제철소에 상당량을 공급키로 합의했다.
자존심을 버리고 겨우 계약을 성사시킨 후 출장자들과 로렌스 길의 설렁탕 집에서 쓴 소주를 털어 넣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2000년대 초 미국 이민 후 의류 무역업체에서 일을 하면서 시카고를 다시 찾았다. 시카고 북서 서버브 나일스에서 열리는 트레이드 쇼는 의류업체가 소매업을 하는 수요가와 만나는 주요 통로였다. 시카고는 물론 인디애나 주 인디애나폴리스•오하이오 주 콜럼버스 등 인근 도시의 의류 소매상들이 공급업체를 만나기 위해 모여들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 동포들이 소규모 옷가게를 많이 했고, 이들을 위한 의류 무역업체들이 많았다. 나일스 쇼는 규모도 상당해서 행사 기간 중 인근 호텔 가격이 급등할 정도였다. 하지만 '스트리트 패션'으로 불리던 힙합 풍의 의류가 퇴조하고, 백화점 중심으로 의류 산업이 재편되면서 나일스 쇼 규모도 점차 축소됐다. 게다가 지금은 대형 백화점들마저 아마존으로 대표되는 인터넷 쇼핑업체에 나가 떨어지고 있다.
의류업계를 떠난 지 어느덧 8년 가까이 되는데, 나일스 쇼에서 만났던 옛 고객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시카고는 방문할 때마다 깨끗한 느낌을 받았다. 다운타운과 시카고강, 미시간호수, 애들러 천문대, 시어스 타워, 존행콕 센터, 도심 고가철도 위의 전철, 볼 것 많았던 박물관, 로렌스 길의 한식당들, 아름다운 노스웨스턴대학 캠퍼스... 많은 것들이 머리 속을 왔다 갔다 한다.
원고를 부탁한 친구를 보기 위해서라도 한 번 가야 하는데, 시간 내기가 쉽지 않다.
▶필자 박제순 약력 : 서울대 영문과 졸, 포스코 미국 주재원, 현 Kumon Math and Reading Center of Closter, NJ 대표
박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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