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새롭게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안에 입력된 수많은 기억과 정보와 관념들을 일시에 지워버리고 아무 것도 입력되기 이전의 순수한 자기의 본래 면목 불성이 훤히 나타나 보이는 것을 말한다.
간화선을 할 경우 화두(공안)를 밖에서 찾거나 또는 염불선의 경우 아미타부처님을 10만억 국토 저 밖에 있는 부처를 찾는다면 오랜 세월이 지나도 정각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느 처사가 태화산 청련암에서 100일 동안 일종식(하루 한 끼)을 하고 "나무아미타불" 기도를 하루에 1만번 이상씩 열심히 하였다. 그런데 100일 기도 회향하는 날 크게 한 번 웃고는 "내가 나를 찾고 (부르고) 있어구먼" 하더라는 것이다. 조그만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내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하는 것은 헛고생(지도를 보지 않고 길을 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팔만대장경은 굳이 나누면 대승과 소승이 된다. 부처님의 설법 중에 "최초 화엄 37일"이라고 해서 성도 후에 맨 먼저 형이상학적인 화엄 법문을 하셨으나 그 당시의 대중들이 이해를 못했기 때문에 소승법부터 시작해서 '내가 있고 너가 있고 물질이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이런 법문을 주로 하신 것이다.
화엄경과 금강경 등 대승 경전에 무엇이 설해져 있는가 하면 "인간은 부처다"라고 것이다. 인간은 본래 부처이고 불성을 갖고 있으며 그 부처의 실상을 깨달으면 나를 찾는다는 것이며 그 대승 경전을 이해하도록 하는 단계까지 이끌어 가기 위하여 소승의 가르침을 비유와 방편설로서 이 모양 저 현상으로 설해 놓은 것이 소승 경전이다.
부처님 당시에야 대중들이 배우지도 못하고 법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불멸후 몇 백년이 지난 뒤 대중들의 식견이 좀 높아지고 시기가 성숙해진 뒤에 마명대사가 '대승기신론'을 지었고 또한 용수보살이 기원전 2세기경에 출세하여 대승법을 널리 홍포하였으므로 제2의 석가라고도 한다.
전기에 따르면 당시 용수보살은 대승을 더 공부하기 위하여 대승경전을 아무리 찾아도 이 땅 위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용궁에 가서 구해 왔다고 한다.
그러므로 화엄경은 용궁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고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세계로 가져와서 번역한 것이 화엄경이고 이것은 용궁에 보존되어 있는 것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원래 용궁에 있는 화엄경은 상본 중본 하본이라고 한다. 현재의 화엄경도 어마어마한 분량인데 아직도 용궁에 남아있다는 화엄경은 과연 얼마나 더 훌륭한 대승 법문일까?
필자는 입산 초기 용궁에서 가져왔다는 것이 아무래도 의심스러워서 큰 스님(청화 대종사)께 여쭈어보았다.
"큰 스님 화엄경을 용수보살이 용궁에서 가져왔다는 부분에 대하여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잘 안가는 데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하고 우문을 하였다. 이 대목에서 큰 스님의 답을 듣기 전에 독자 여러분은 눈을 감고 답을 한 번 내려보시기 바랍니다.
큰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한 번 깨달으면 용궁이고 천상이고 그 자리가 그 자리 아니겠는가." 아 쾌재쾌재라 통쾌하구나.
# 090203_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