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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전대통령 서거] 청문회 스타 → 대통령 → 피의자 굴곡 마감

'인권 변호사' 내세워 제도권 정치에 투신

숨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은 실패와 시련 정치적 부침 속에서 성공과 추락을 반복했다.

노 전 대통령의 정치일생은 '오뚜기'와도 같았다. 어려운 가정환경 상고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노 전 대통령이 변호사로서의 순탄한 삶을 스스로 포기하고 1988년 정치권에 뛰어들면서 역경의 반복은 시작됐다.

'인권 변호사'라는 수식어를 달고 제도권 정치에 투신한 노 전 대통령의 첫출발은 성공적이었다.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 의해 발탁 배지를 단 노 전 대통령이 그해 5공 청문회에서 송곳 질문으로 증인들을 거침없이 몰아세움으로써 일약 '청문회 스타'가 된 것.

노 전 대통령의 대표 가치인 '원칙과 소신'이 처음으로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원칙과 소신'은 커다란 자산이면서도 노 전 대통령을 비주류의 길로 이끌었다. 노 전 대통령은 90년 3당 합당 때 "역사적 반역"이라며 합류 권유를 뿌리친 이후 92년 총선 패배 95년 부산시장 도전 실패 96년 서울 종로 패배 등 '3수'를 맛봐야 했다. 특히 2002년 노 전 대통령의 대선 도전은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았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설 때만 해도 노 전 대통령을 바라보는 정치권의 시선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개혁과 변화의 바람을 내건 노 전 대통령은 광주에서 진행된 경선에서 `광주의 선택'이라 불리는 경선 1위를 차지한데 이어 그 여세를 몰아 '노풍'이라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제16대 대통령에 당선 정상에 우뚝 섰음에도 원칙과 소신에 기인한 노 전 대통령의 시련은 이어졌다. 재신임 선언 급기야 2004년 탄핵에 이르기까지 고비고비의 연속이었다.

그 때마다 노 전 대통령은 예외없이 정공법을 선택해왔다. 정책에 있어서 정치적 결정에 있어서 소신에 바탕을 둔 승부수는 야당은 물론 여당 일각의 반발도 불러일으켰다.

권력기관 중립화를 비롯한 권위주의 해체 헌법만큼 바꾸기 힘든 부동산제도 한미관계 재정립 자주국방 햇볕정책 승계에 따른 남북 정상회담 대연정 선언 등은 엇갈린 평가 속에서도 '노무현다움'의 결정판이었다.

이는 정치적 자양분인 소신의 결과물인 동시에 '정치적 부채'가 없는데 따른 도덕성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퇴임후 1년만에 자신을 지탱해준 기둥인 '도덕성'의 붕괴 위기에 직면했다.

진실여부는 뒤로 하고라도 30일 피의자 자격으로 검찰에 출두 도덕성의 기반이 허물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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